붉은 잔향의 다잉 메시지

by 김경훈

세상은 시각을 잃은 자에게 어둠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해다. 시각이 사라진 자리는 수만 가지의 냄새와 소리 그리고 촉각으로 채워진다. 나의 세계는 암흑이 아니라 밀도 높은 감각의 숲이다. 내 이름은 엘리야. 사람들은 나를 사설탐정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저 남들이 놓친 냄새와 소리를 쫓는 사냥개에 불과하다. 내 발치에는 진짜 사냥개이자 나의 완벽한 길잡이인 래브라도 리트리버 탱고가 엎드려 있다. 탱고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이 낡은 사무실의 유일한 백색소음이다.


오후 세 시. 예약된 의뢰인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발소리는 가볍지만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마찰음이 불규칙했다. 긴장하고 있거나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내뿜는 체취가 책상을 넘어 내 코끝에 닿았다. 옅은 재스민 향수 냄새 위로 수면 부족으로 인한 씁쓸한 땀 냄새와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에서 나는 짠내가 섞여 있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나는 시선을 앞을 향해 둔 채 말했다. 탱고가 짧게 꼬리를 치며 바닥을 두드렸다.


의뢰인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묵직한 유리병이 나무 탁자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서 미세한 결로 현상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병의 윤곽을 더듬었다. 넓은 어깨와 짧은 목. 익숙한 형태였다.


맥캘란이군요. 내가 말했다.


의뢰인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보이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아셨나요.


병의 모양과 무게 중심 그리고 코르크를 감싸고 있는 납 씰의 질감입니다. 이 정도 무게감이라면 이십오 년 산 이상이겠군요. 무슨 일로 이 귀한 위스키를 제게 가져오신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 주 전에 죽은 제 약혼자가 남긴 유품입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즉사했어요. 경찰은 졸음운전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을 수 없어요. 그는 사고 전날 밤 자신의 사무실 금고에 이 위스키 병을 넣어두고 비밀번호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예약 이메일을 보냈어요. 자기가 만약 잘못되면 금고를 열어보라고요. 그 안에는 이 병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병을 더듬었다. 납 씰은 이미 뜯겨 있었다. 병뚜껑을 열어보셨습니까.


네. 열어봤어요. 하지만 이상했어요. 그는 위스키 수집가였고 맥캘란을 가장 아꼈습니다. 그런데 병 안에 든 건 그가 평소에 마시던 냄새가 아니었어요. 탐정님이 후각이 매우 뛰어나다고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이 병 안에 든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왜 죽기 전에 이것을 금고에 숨겼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병목을 쥐고 코르크를 천천히 뽑았다. 뽕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갇혀 있던 공기가 풀려나왔다. 나는 코를 병 입구에 가까이 가져갔다. 시각장애인에게 후각은 곧 시력이다. 냄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입으로 수만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지만 그가 남긴 냄새는 그가 머물렀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감정까지 고스란히 저장한다.


첫 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말린 자두와 묵직한 셰리 오크의 향기. 맥캘란 특유의 달콤하고 고급스러운 풍미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삼 초 뒤 그 우아한 향의 장막이 걷히고 이질적이고 폭력적인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이것은 맥캘란이 아니다.


바다의 짠내. 거칠게 타오르는 이탄의 연기 냄새. 통후추처럼 알싸하게 코끝을 때리는 스파이시함. 혀뿌리를 아리게 만드는 강력한 피트 향. 이것은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에서 만들어지는 탈리스커다. 그것도 십 년 산의 거칠고 야생적인 향기. 맥캘란의 빈 병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탈리스커를 채워 넣은 것이다.


하지만 후각의 해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탈리스커의 거친 바다 냄새 밑바닥에 또 다른 냄새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알코올의 휘발성에 섞여 교묘하게 숨어 있었지만 내 코를 속일 수는 없었다. 위스키에서 나서는 안 되는 냄새. 인공적인 조향의 흔적.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묵직한 머스크와 달콤한 바닐라 그리고 동물적인 체취가 연상되는 시나몬과 클로브의 배합. 관능적이다 못해 짐승의 냄새를 흉내 낸 듯한 이 향기는 분명했다. 프레데릭 말의 뮤스크 라바줴.


향수 냄새가 섞여 있군요. 내가 말했다.


의뢰인이 놀란 듯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향수요. 위스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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