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놀이터의 비애와 혁신이라는 신기루

by 김경훈

이천이십육년 인공지능이 세상을 통째로 뒤바꾸는 대전환의 원년이라고들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와 경제학자 슘페터는 일찍이 그 해답을 내놓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장과 생산 방식을 개척하는 모험심 바로 기업가정신이다 한국판 젠슨 황이나 손정의가 혜성처럼 등장해 주기를 온 사회가 간절히 바라는 시점이다


그런데 참으로 얄궂은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업가정신을 북돋워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모험가들의 날개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멍석을 깔아준 규제 샌드박스 안에서 사 년간 고군분투하며 부동산 토큰증권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루센트블록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십만 명의 고객을 모으며 비즈니스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제도가 정비되는 길목에서 정작 정식 사업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 빈자리는 기존 증권업계와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준공공기관들이 꿰찼다 혁신을 실증하라고 만든 샌드박스가 단어 뜻 그대로 덧없는 모래 장난으로 끝나버린 셈이다 땀 흘려 쌓아 올린 모래성을 하루아침에 기득권에게 넘겨줘야 하는 이 잔혹한 놀이터에 앞으로 어느 벤처기업이 기꺼이 뛰어들지 의문이다


가상자산 시장을 개척한 두나무나 빗썸 같은 거래소들이 마주한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십여 년 전 규제조차 없던 황무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을 일궈냈지만 돌아온 것은 대주주 지분 규제라는 철퇴다 거래 플랫폼은 공공 인프라와 같다는 명분 아래 대주주의 지분을 강제로 분산시키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방침은 참으로 기가 막힌다 거친 들판을 피땀 흘려 옥토로 개간해 놓았더니 이제 와서 그 텃밭을 마을 공동 소유로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이재명 대통령이 약속했던 기업인 배임죄 폐지는 기약 없이 표류 중이고 상법 개정을 밀어붙이면서도 정작 기업들이 호소하는 최소한의 경영권 방어 장치 마련은 귓등으로 흘리고 있다 코스피 지수가 육천 선을 훌쩍 넘으며 시중 자금이 부동산을 떠나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지만 정작 혁신을 이끌어야 할 기업가들의 도전 정신을 꺾어버린다면 증시의 선순환도 결국 갈 곳 잃은 수건돌리기에 불과해질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기업가정신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험의 대가가 빼앗긴 모래성과 강제 매각뿐이라면 이 알량한 희망의 불씨는 언제든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혁신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의 땀방울에서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뼈저리게 되새겨야 할 때다


혁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뛰는 이들의 등 뒤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잃어버린 모래놀이터의 비애를 딛고 진정한 기업가정신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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