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기술

by 김경훈

오늘도 안내견 탱고의 꼬리는 모터가 달린 듯 힘차게 흔들린다. 목적지는 언제나처럼 동네의 한 커피 전문점이다. 얼음 많이 우유는 적게, 그리고 카라멜 드리즐은 듬뿍 올린 차가운 라테 한 잔은 문헌정보학 논문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나만의 마법 포션이다. 하지만 이 달콤한 휴식을 쟁취하기 위해 나는 매번 보이지 않는 벽과 마주해야 한다. 바로 매장 입구를 떡하니 지키고 있는 매끈한 키오스크다.


혁신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이 똑똑한 기계는 시각장애인인 나에게는 그저 차갑고 단단한 유리판일 뿐이다.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지만, 정작 내가 카라멜 드리즐을 추가했는지, 아니면 에스프레소 샷을 세 개나 때려 넣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내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해질 때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누군가에게는 줄을 서지 않게 해주는 편리한 문명의 이기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가로막는 조용한 폭력으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의 발명품이 살상 무기로 쓰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의 기술도 종종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남긴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정교한 알고리즘이 우리의 시간을 순식간에 훔쳐가는 것도, 카페의 키오스크가 디지털 소외계층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기술적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이 정해놓은 속도와 방식에 억지로 발을 맞춰야 하는 데이터 조각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각장애인의 정보 리터러시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매일 이 차가운 유리판과 씨름하는 당사자로서 나는 비폭력 기술이라는 개념을 자주 떠올린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비폭력 대화가 상대의 상처에 공감하고 진심으로 소통하는 것이라면, 비폭력 기술은 기술의 편리함 뒤에 가려진 소외된 이들의 불편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도 손쉽게 주문할 수 있는 음성 지원 키오스크나, 화면의 구조를 직관적으로 읽어주는 섬세한 접근성 기술처럼 말이다.


혁신은 분명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 혁신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개발 단계에서부터 다양성과 윤리성이라는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야 한다. 기술이 그저 똑똑하고 차가운 기계로 남을지, 아니면 인류를 보듬는 다정한 이웃이 될지는 결국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감 능력에 달려 있다. 다음번 카페 방문 때는 탱고가 앞발로 화면을 짚어 내 라테 주문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적어도 키오스크가 나에게 어떤 메뉴를 고르셨냐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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