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소음 공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냄새 공해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소리는 쉽게 규제하고 항의할 수 있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로 여겨진다.
반면 냄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 영역의 문제로 치부된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감각의 위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각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위계는 때로 매우 폭력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여기 하나의 흔한 여름날 풍경이 있다.
후텁지근한 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양한 냄새들이 뒤섞여 거대한 후각적 소음을 만들어낸다.
덜 마른 빨래의 시큼한 냄새 누군가의 점심이었을 마늘과 고기 냄새 무더운 날씨가 증폭시킨 땀 냄새가 뒤섞여 있다.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후각적 침해다.
그런데 같은 강의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전화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용기 있는 누군가는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소음이 공적인 규제의 대상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냄새를 지적하는 것은 어떨까.
옆 사람에게 덜 마른 옷 냄새를 좀 줄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아마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냄새에 대한 지적은 곧 그 사람의 위생과 생활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각의 침투성 측면에서 보면 냄새는 소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강력하다.
소리는 귀를 막으면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냄새는 숨을 쉬는 순간 막을 수 없이 몸 안으로 침투한다.
원치 않는 냄새는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처럼 냄새는 그 어떤 방어막도 쉽게 뚫고 들어오는 가장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형태의 공해이다.
물론 이 문제를 특정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뿐 아니라 후각적 풍경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후각적 에티켓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는 시각이나 청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더 예민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섬세하고 절실한 배려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냄새를 공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감각의 위계를 넘어 진정한 배려와 존중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