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아래의 증언

by 김경훈

바람이 잎사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로 나무의 종류를 가늠한다.


넓고 얇은 활엽수는 파도처럼 철썩이는 소리를 내고 뾰족한 침엽수는 비바람처럼 솨아아 하는 소리를 낸다.


나에게 숲은 수만 개의 악기가 연주되는 거대한 교향악단과 같다.


내 곁에는 안내견 탱고가 일정한 속도로 발을 내디디며 나의 완벽한 눈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수목원 산책로를 걷고 있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온도감이 피부에 닿는다.


흙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소리와 축축한 부엽토의 냄새가 폐부를 깊숙이 채운다.


도심의 매연과 소음에 지쳐있던 나의 감각들이 숲의 고요함 속에서 서서히 이완되는 것을 느낀다.


결혼 준비로 바빴던 보보가 주말을 맞아 탱고와 함께 산책을 다녀오라며 챙겨준 시간이었다.



산책로의 중반쯤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탱고의 하네스를 잡은 손에 갑자기 강한 텐션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정해진 길 한가운데로 나를 이끌어야 할 녀석이 산책로를 벗어나 오른쪽 흙길로 방향을 튼 것이다.


안 돼 탱고 돌아가.


내가 짧게 명령했지만 탱고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코를 바닥에 바짝 대고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앞발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의 후각은 일상적인 산책에서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다.


녀석이 이렇게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은 흙 아래에 무언가 심각한 이상 징후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지팡이를 접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었다.



탱고가 파헤친 흙의 질감은 주변과 완연히 달랐다.


자연스럽게 비바람에 다져진 땅이 아니라 최근에 누군가 인위적으로 깊게 파냈다가 다시 덮은 부드러운 흙의 촉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바스러지는 흙을 걷어내자 차갑고 매끄러운 인공물이 내 손끝에 닿았다.


직물이나 나무가 아닌 가죽의 질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의 흙을 더 털어내고 그 물건의 전체적인 윤곽을 더듬었다.


금속 버클이 달린 여성용 가죽 핸드백이었다.


나는 가방에 코를 아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깊은 땅속의 습기와 곰팡이 냄새 사이로 지극히 이질적인 향기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고급스러운 장미 향과 베르가모트가 섞인 니치 향수 냄새 그리고 그 위를 무겁게 덮고 있는 지독한 화학 약품의 냄새.


이것은 산책객이 실수로 떨어뜨린 단순한 분실물이 아니다.


누군가 타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은 것이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음성 인식 기능을 이용해 알고 지내는 강력반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확한 위치 좌표를 전송하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숲의 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누군가 이 숲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왔지만 나의 청각은 반경 십 미터 안의 모든 미세한 파동을 스캔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무거운 군화 발소리 여러 개가 흙길을 밟으며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형사는 폴리스 라인을 치고 감식반을 부른 뒤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엘리야 탐정님 이 가방 주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주일 전에 이 수목원에서 실종된 이십 대 여성의 것입니다.


경찰은 그동안 그녀가 등산로를 이탈해 가파른 절벽 아래로 실족한 것으로 추정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가방이 산책로 근처 땅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는 것은 실족이 아니라 타살 후 유기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형사는 가방에서 나는 화학 약품 냄새에 대해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이 냄새는 일반 가정에서 쓰는 살충제나 방향제가 아닙니다 특정 성분의 제초제와 부패를 늦추는 방부제가 섞인 아주 독한 냄새입니다 수목원의 토양이나 병충해를 관리할 때 쓰는 특수 약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방을 묻은 사람은 이 수목원의 지형과 관리용 약품 사용에 아주 능통한 내부자일 겁니다 외부인이 굳이 삽을 들고 와서 남의 수목원 땅을 파고 가방을 묻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경찰은 즉각 수목원 관리소 직원들을 통제하고 한자리에 모았다.


나는 형사의 안내를 받아 직원들이 모인 관리소 임시 휴게실로 들어갔다.


일곱 명의 남녀가 뿜어내는 체취와 숨소리가 좁은 공간에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불안감 짜증 두려움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호기심.


나는 탱고의 하네스를 잡고 천천히 그들 앞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내 목적은 단 하나 그 흙더미 아래에서 맡았던 특유의 제초제와 장미 향수의 융합된 냄새를 찾는 것이었다.


첫 번째 직원은 땀 냄새와 인스턴트 커피 냄새가 났다.


두 번째 직원은 강한 담배 냄새와 껌 냄새가 났다.


세 번째 직원 앞을 지날 때 탱고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 코끝에 익숙한 화학 약품의 냄새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를 범인으로 단정하기 부족했다 수목원 직원이라면 누구나 작업 과정에서 제초제 냄새가 옷에 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허공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주로 어느 구역을 관리하십니까.


남자가 불쾌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측 야생화 군락지입니다 그게 왜요.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호흡은 방어적이었다.


나는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의 입자들을 머릿속에서 더 깊이 분해하고 분석했다.


작업복에 깊게 밴 흙냄새와 오래된 땀 냄새 그리고 코를 찌르는 제초제 냄새 그 밑바닥에 아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달콤하고 무거운 장미 향기.


가방의 주인이 뿌렸던 바로 그 니치 향수의 잔향이었다.


화학 약품의 냄새는 작업 환경에서 묻을 수 있지만 이십 대 여성이 쓰는 고급 향수 냄새가 흙투성이 작업복에 짙게 배어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남자는 여자를 살해하고 가방을 빼앗아 묻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이나 소지품과 아주 강하게 물리적으로 접촉했던 것이다.



나는 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


이 분의 작업복과 장화를 국과수에 넘겨 정밀 검사해 보십시오 피해자의 향수 성분과 피해자의 가방이 묻혀 있던 곳의 토양 성분이 동일하게 검출될 겁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휴게실 공기를 찢을 듯이 울렸다.


그가 뒤로 물러서며 낡은 철제 의자를 걷어차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 여자 본 적도 없어 냄새 좀 났다고 사람을 살인마로 모는 거야.


하지만 그의 발소리는 이미 출입문을 향해 급하고 어설프게 도망치려 움직이고 있었다.


탱고가 크게 짖는 소리와 함께 형사들이 그를 덮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남자는 바닥에 뒹굴며 거칠게 발악했지만 이내 수갑이 채워지는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제압되었다.



며칠 뒤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자는 수목원 통제 구역에 몰래 들어와 사진을 찍던 여자를 내쫓으려다 시비가 붙었고 분노를 참지 못해 둔기로 내리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여자의 시신은 탱고가 가방을 찾아낸 곳에서 멀지 않은 으슥한 계곡 아래에서 썩은 낙엽과 잔가지들로 덮인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남자는 경찰의 수색 방향을 돌리기 위해 가방을 엉뚱한 산책로 주변 땅속에 묻었지만 그 어설픈 은폐 시도가 오히려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말았다.



사건을 해결하고 나는 수목원 입구를 빠져나와 조용한 나무 벤치에 앉았다.


탱고가 내 무릎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나는 녀석의 따뜻하고 든든한 체온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육포를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인간은 완벽한 은폐를 꿈꾸며 자신의 죄악을 깊은 흙 아래에 묻으려 한다.


하지만 거대한 자연은 결코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는다.


냄새는 보이지 않는 공기를 타고 흐르고 흙의 질감은 인위적인 손길에 의해 변형되며 억울한 영혼의 미세한 진동은 발끝을 타고 지상으로 전해진다.


시각이 완벽하게 차단된 나의 어두운 세계에서 이 모든 감각의 파편들은 하나로 모여 가장 뚜렷하고 거대한 진실의 형상을 조각해 낸다.


오늘도 나의 완벽한 동반자 탱고의 예민한 코끝이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뻔한 억울한 죽음을 빛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집에 도착하면 보보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는 탱고의 훌륭한 활약을 기념하며 녀석을 위한 특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산들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내 머리 위 나무들이 일제히 잎을 뒤척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스산하면서도 평화로운 소리는 마치 차가운 땅속에서 눈을 감은 그녀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떠나가는 위령곡처럼 내 귓가에 조용히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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