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의 반쪽

by Hoon

이 나이 먹도록 어릴 때 살던 동네에 있는 치과로 멀리 다닌다. 집이나 회사 근처에 있는 곳으로 옮길까도 싶었다. 한데 내 입 안, 속사정에 대해 그곳만큼 잘 아는 곳은 없다. 그곳이기 때문에 치과를 찾는 본능적 공포감을 조금 물리친다. 이동의 불편을 감수할 만하다. 치과에 가는 날이면 이따금, 어쩌면 자주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전화를 건다. “퇴근하고 뭐하냐?” 물으면 “치과 오는 날이냐?” 반문하는 지경이다. 녀석도 오래전에 이사, 아니 독립해서 지금은 가까운 옆 동네에 산다. 별일 없다고 하면 옛날 동네 골목에서 만나는 거다. 일전에는 이십 년 단골이 훌쩍 넘은 돼지 막창 집에서 보았다.


근래 두어 번 정도 녀석과 못 만났다. 퇴근하고 선약이 있단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또 연락 하마 했는데 녀석 마음에 걸렸나 보다. 며칠 전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지 말고 날 정해서 따로 보자, OK! 이번에는 녀석과 우리 집 사이 동선 어디쯤에서 만나기로 했다. 야, 그럼 왜 전에 너랑 갔었던 숙성회 코스로 나오던 가게 거기로 가자, OK! 내가 예약 하마, 까지 말하려는데 잠깐, 한 사람 더 있단다. X알 친구 사이면 본능적으로 안다. 여자냐? 어어.


녀석은 아직 싱글이다. 만혼이 대세라지만 아예 결혼에 뜻이 없는 듯도 보였다. 몇 해 전에 아주 오래 교제한 여인과 헤어진 후로는 완전히 마음을 접은 줄 알았다. 결혼은 몰라도 연애까지 그만둔 건 아니렷다, 촤식! 어떤 사람일지 무척 궁금했다. 나이는 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사귄 지는 얼마나 된 건지,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마치 나한테 일어난 일처럼 설레어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이 말랑말랑한 느낌!


그렇지만 나는 만나면 아무것도 먼저 묻지 않을 셈이었다. 처음부터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았다. 왜냐, 내 호기심만 채우려는 조심성 없는 질문만으로도 상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이젠 그런 걸 아는 나이니까. 친구 학교 앞으로 놀러 가 녀석 여자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물어보던 시절과는 다르니까. 그래서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는 가만히, 잠자코 기다릴 셈이었다. 그저 반갑게 맞이하고 상냥하게 대하려고 했다. 왜냐, 죽마고우의 연인이니까. 내가 아끼는 이가 자신보다 아끼는 이일 테니까.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과 만날 때면 시간 약속 하나는 칼 같다. 조금 늦을 것 같다, 나도 실은 가는 중이다 따위는 없다. 유유상종, 비슷한 녀석들끼리 만나서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 식당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펼쳐보는데 녀석이 들어온다. 전화로 먼저 말한 한 사람, 여인의 손을 잡고. 왔어? 어어, 오래 기다렸냐?, 아니 나도 방금 막 왔다, 자기야 인사해 내 친구 Hoon,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많이 들으셨다고요? 그랬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앉자 앉자!


해산물 좋아하세요? 녀석의 그녀에게 물었다. 아주 좋아한단다. 잘 되었다. 초면에 먹는 것까지 안 도와주면 영 어색하고 불편하고 재미없다. 술은 좀 하시냐 물었다. 나보다 잘 드셔, 소주파야, 친구 녀석이 대신 답한다. 내 질문은 여기까지.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가벼운 주변 정보만 취급하며 어색한 공기를 데운다. 마침 녀석이 운을 뗀다. 제대로 통성명하자면 이쪽은 네 이름 많이 들어서 벌써 아시고 이 분 성함은 OOO시다, 나이도 좀 있으셔, 하는데 그녀가 녀석 어깨를 툭 친다.


녀석과 나보다 연상이다. 녀석처럼 금융업에 종사할 뿐 아니라 같은 직장. 십여 년 전 회사 선배와 후배, 엄밀히는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로 처음 만났다. 다른 지점에서 일하다 한두 해 전 지금 일하는 곳에서 재회했다. 이성의 감정으로 바뀐 건 그러고 나서다. 실은 집을 합쳐 같이 살게 된 지 이제 두어 달 되었단다. 예식은 따로 올리지 않았지만 배우자, 반려자 사이로 지내고 있다. 한 마디로 부부로 봐주면 된단다. 부부는 같은 지점에서 일하면 안 된다는 회사 방침이 있다. 그래서 회사에선 아직 비밀 커플이다. 공개하는 시점에 혼인신고도 할 계획이다, 까지 들었다. 야, 하나씩 얘기해라, 그렇잖아도 네가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오늘 아무것도 묻지 않을 셈이었고 먼저 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신규 정보가 폭풍처럼 업데이트되니까 어지러울 지경이다, 오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술 마셔야겠네, 공연한 너스레를 떨었다.


제수씨, 아니 제수님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네요, 제수님 한 잔 받으세요. 짓궂은 농담으로 그녀와 거리를 좁혀본다. 녀석이 말을 잇는다. 이게 다가 아니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단다. 그녀는 돌아온 싱글, 그러니까 재혼이고 먼저 한 결혼에서 사내아이가 하나 있다. 엄마 손길이 필요 없을 만큼 다 컸고 며칠 전에는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단다. 아이도 친구 녀석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여서 무척 다행이란다. 오호라, 그렇구나, 그래 먼저 말해줘서 너무 고맙고, 두 사람과 오래 알아가는 데 필요한 배경 정보 정도로 알고 있겠다, 참말로 축하하고 두 사람의 만남이, 합가가, 결혼이 나한테 일어난 일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참 잘 되었다. 나만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겠지만 녀석은 전 연인과 헤어진 이후로 무척 힘들어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여인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화불단행인 것인지 몸도 이곳저곳 아프고 하는 일도 잘 풀리지 않았다. 지켜보기가 그렇게 안타깝고 안쓰러울 수 없었다. 가끔 만나서 술잔 부딪쳐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몸도 성치 않아서 그나마 술도 제대로 못 마셨다. 겨우 소주 몇 잔 마시고 골골 대는 걸 보려니 속이 다 상했다. 그랬던 녀석이 저기 맞은편에 무척이나 흡족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인생에 새로, 다시 나타난 여인과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본다. 인내의 틈으로 삐쳐 나온 질문을 던진다. 부부 싸움도 하냐고 묻는다. 그럴 일 있겠어, 하며 두 내외가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다. 경험과 관록은 역시 값지다. 이십 대 중후반과 겨우 서른 한두 살, 나와 아내의 전쟁처럼 치열했던 신혼과는 또 다른 빛깔이다. 알록달록 반짝거리지 않지만 은은하고 보드랍다. 그것대로 멋있고 좋았다.


녀석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다. 성질 고약하고 몸 허약한 아들, 너 아니면 누가 맞춰서 같이 살아주겠냐며 그렇게 고마워하실 수가 없단다. 듣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며칠 전엔 녀석도 모르게 고부간에 저녁때 맛있는 것 먹으면서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노래방에도 다녀왔단다. 우리 시어머니, 완전 가수라고 그녀가 말한다. 우리 엄마가?, 친구 녀석이 어리둥절해한다. 정말 잘하셨어요, 제가 다 고맙네요,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질문을 좀 이어도 되겠다 싶었다. ‘집콕’ 스타일이시냐, 바깥 활동을 좋아하시느냐 물었다. 놀러 다니는 것도 여행 가는 것도 좋아한단다. 혹시 캠핑은 가보셨는지 묻는다. 아뇨, 기회만 되면 꼭 가보고 싶었어요, 답이 돌아온다. 오호라, 이것도 잘 되었네. 단둘이 캠핑 한 번 가자고 했다가 퇴짜 놓은 친구 녀석에게 “잘 들었지? 너희 안주인께서 가고 싶으시단다. 조만간 제대로 날 한 번 잡아보자.”며 으름장을 놓는다. 녀석이 마음에도 없이 인상을 찡그린다.


녀석과 나의 이런저런 대화를 듣던 그녀가 말한다. 두 분이 왜 친구인지 알겠네요, 호호. 왜 아니겠어요, 끼리끼리 뭉치는 거죠 뭐, 맞장구친다. 자못 진지하게, 한 해 두 해 나이들 수록 사람은 결국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고 남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선택이 끝난 분에게 쓸데없는 영업이겠지만 녀석이 아주 착하진 않아도 제법 좋은 놈이고, 그런 친구를 둔 저이니 저도 그럴 것이고 저와 같이 사는 여인도 그런 사람일 테고 제수씨, 아니 제수님도 같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제 처도 조만간 소개해드릴 테니 우리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자, 주제넘은 말까지 보탰다. 초여름 공기가 싱그러운 밤이었다. 부부가 별건가, 별거지. 상처 하나쯤 품은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주면서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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