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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30. 2022

인사팀장의 전보

  일전에 회사 인사팀장과 점심을 한 끼 나누었다. 나보다 두어 살 위. 사적 친분으로는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 번을 편하게 말 놓는 법이 없다. 직렬이 다른 내게 베푸는 배려다. 사석에선 제발 좀 편하게 하셔라, 도통 원대로 해주지 않는다.


  그런 그가 무척 힘들어했다. 그는 노사의 접경에서 합리적인 중재자가 되고 싶었다. 경영진은 더 적극적으로 사측의 논리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그를 나무랐다. 인사팀장, 요직임에 틀림없다. 모쪼록 왕관의 무게를 견디시라 위로했다. 왕관은요 무슨, 권한은 없고 책임만 태산 같은데요. 돌아오는 그의 대답이 안쓰러웠다. 금방 식어 미지근해진 갈비탕을 비웠다. 후식 커피 한 잔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어났다. 오후에도 회의가 줄을 섰고 준비하러 들어가 봐야 한다는 그와 헤어졌다.


  정기 인사발령이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이맘때 그리고 해 바뀔 때 한다. 회사원 초미의 관심사다. 회사 내 미묘한 기류에 심드렁한 나도 이때만큼은 안테나를 길게 세운다. 당장 내 이동수가 없다고 관심 끌 수 없다. 누가 가냐, 누가 오냐에 따라 회사원은 서로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다. 큰 거미줄에 다 함께 걸려있는 신세다. 저쪽이 출렁이면 나도 그 진동을 느낀다. 오전 어느 때쯤 사내 전산망에 게시될 거라고 들었다. 예상한 시간에 인사팀에서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음, 이 사람이 승진했구나. 오, 저 사람은 저쪽으로 갔구나. 엇, 우리 쪽으로 그 사람이 오네. 읽어 내려가는데 눈에 굵은 글씨로 한 줄이 들어온다.

‘<전보> OOO(경영본부 인사팀장)        명 ***본부 @@@팀’

전보, 보직의 변경을 뜻한다. 한 마디로 다른 부서로 가게 됐다는 뜻이다. 이름 뒤에 괄호는 종전까지의 보직이다. 여백 띄우고 ‘명’ 어디.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어느 부서로 옮기라는 회사의 명령이다. 경영본부 소속의 인사팀장 아무개가 현 시간부로 짐을 챙겨 다른 본부 어느 팀으로 가게 됐다는 말이다. 자세히 보니 팀장도 아니고 팀원으로 간다.


  아! 인사팀장 다른 본부로 가게 됐구나. 같이 밥 먹었을 때 어떻게 지내시느냐, 실은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낯빛이 어둡고 어깨가 땅으로 꺼진 것이 잘은 모르지만 힘들어 보이셨다 물었다. 그도 부인하지 않고 힘들죠 뭐, 했었다.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고도 했다. 퇴근해서 집에 가도 온통 회사일 생각에 식구들이 부르는 게 안 들리더란다. 아이들에게는 일절 안 하던 짜증과 화를 내고 있더란다. 얼마 전에는 아내, 그러니까 나에게는 형수가 되는 부인께서 “여보, 그렇게 힘들면 회사에다 다른 일 하게 해달라고 하면 안 돼?” 하셨다. 급기야는 “정 아니다 싶으면 그만둬. 당신이 아이 보고 살림 맡아주면 내가 지금 하는 일 더 매달려서 해보지 뭐. 산입에 거미줄 치겠어!” 하시더란다. 팀장님, 아니 선배님 장가 한 번 끝내주게 잘 가셨다고 추어올렸다. 진심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아니 ‘차라리’가 아니라 그게 맞다. 참고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도 나도 아빠고 남편이다. 가장의 책임감을 모르지 않다.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들 입히고 먹이는 데 못할 일이 없다. 밑에서 덤비고 위에서 누르고, 옆에서 치여도 집에 있을 식구들 생각으로 꾹꾹 참는다. 싫다고 얼른 때려치울 수도 없는 어른이다. 그냥 어른도 아니고 몇 사람 생계, 그들의 행복을 떠받쳐줘야 하는 가장이다. 그럼에도 불구, 그 끝 간데없는 인내도 어디까지나 지속 가능성이 전제될 때 유효한 것이다. 그의 결정을 지지한다. 참다가 깨어지고, 견디다 무너지는 것보다야 백 번 낫다. 버티고 버티던 이가 ‘여기까지다’ 싶을 때는 진짜로 거기까지인 거다.


  그가 나와 밥 한 끼 나누며 했던 얘기는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힘에 부쳤던 거다. 개인의 성향과 조직의 기대가 상충했다. 나는 그의 능력이 부족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회사가 안타까울 뿐이다. 시간이 더 흘러 인사이동 시즌이 다가왔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했을 것이다. 여보, 나 회사에 진짜로 보직 바꿔달라고 얘기하려고. 그래 여보, 그렇게 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옮겨갈 수 있는 자리를 먼저 알아본다. 예전에 모시고 함께 일했던 상관을 찾아간다. 그는 지금 다른 본부의 장을 맡고 있다. 그 본부장이라면 그를 받아줄 것이다. 예의를 갖춰 솔직한 사정을 얘기하면 기꺼이 자리를 살펴봐줄 것이다. 팀장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다시 팀원으로 내려가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된다. 말 그대로 그래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그제야 현 소속 본부장을 찾아간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인사팀장, 아니 인사팀장이었고 이제 다른 본부의 팀원이 된 그를 전보다 더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그의 살고자 했던, 절박하고 용감한 결정을 존중한다. 그 선택을 나보다 몇 백 배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동조했을 그의 반려자, 형수님을 더 크게 지지한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시라고, 주제넘게 조언했던 나는 반성해야 마땅하다. 생각해보면 그 왕관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인지, 그게 왕관인 것은 맞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중요한 건 허울뿐인 간판이 아니라 내 안의 작은 행복 아니겠는가.


  금명간 모교 선배인 그에게 다시 연락을 넣어볼 셈이다. 그땐 점심이었고 이번에는 저녁 시간 넉넉하게 비우고 소주 한 잔 부딪치자고 청하련다. 금방 식었던 갈비탕 말고 보글보글 오래 끓는 전골 요리 같은 거 먹자고. 후배인 제가 한 잔 사겠다고. 그와 나의 가정에 행복의 온기가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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