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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15. 2021

석유 냄새와 짜장면

  대구로 프로농구 중계방송 출장을 간다. 오리온스는 홈 경기장으로 대구 실내체육관을 쓴다.(2021년 현재 대구가 연고지인 KBL 구단은 ‘한국가스공사’다) 40여 명 스태프가 중계방송 준비 때문에 바쁘다. 내 역할은 중계 현장 서브 PD다. 출장 간 세 명 PD 중에 중간 연차다. 현장 PD들은 방송 중에 중계차에 탑승한다. 중계 연출을 위해서다. 메인 PD는 ‘스위처(switcher)’라고 부르는 장비 앞에 앉는다. 열 명이 넘는  카메라 감독들을 호출해가며 스위처 장비의 복잡한 버튼을 조작한다. 서브 PD는 ‘LSM’(Live slow motion의 약자)이라고 부르는 장비를 다룬다. 득점이나 반칙 같은 결정적 장면을 느린 속도로 재생하는 용도다.     


  서브 PD는 중계방송 전에도 쉴 틈이 없다. 후배 PD는 경기 기록 자료를 출력해서 중계석 캐스터와 해설자에게 전달한다. 경기 시작 전에 방송에서 다룰 주요 기록 CG(컴퓨터 그래픽) 내역이 포함돼 있다. 나는 선수 사전 인터뷰를 녹화하기 위해 코트 옆으로 내려간다. 카메라 감독 선배가 어깨에 육중한 ‘EFP(Electronic field production) 카메라(스튜디오나 중계차에서 운영하는 카메라)’를 둘러업었다. 아나운서가 지난 경기 소감, 오늘 경기에 임하는 각오, 감독의 특별 지시사항, 상대팀 라이벌 선수를 제압할 작전 등을 물어본다. 얼른 중계차로 돌아가 인터뷰 주요 장면을 편집한다. 전용 회선을 통해 회사로 보낸다. 부조정실 진행 PD가 받아서 자막을 입히고 최종 편집해서 완성한다.     


  나만 밥때가 늦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쳤다. 미리 경기장 근처 식당을 섭외했다. 전골요리 따위를 판다. 선배와 후배 PD에게도 먼저 식사하고 오라고 한 터다. 적어도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는 중계차에 타 있어야 한다. 끼니를 거를 수는 없다. 지금 굶으면 이따 밤 늦게 까지 빈속이다. 밥심으로 일한다. 기력 딸려서 실수라도 하면 바로 방송 사고다. 전골 말고 금방 나오는 메뉴가 뭐 있을까. 퍼뜩 경기장 맞은편에 허름한 중국집을 떠올린다. 그래, 짜장면 한 그릇 후딱 비벼 먹고 오자.     


  중국집으로 호다닥 달려간다. 문틀에 걸어놓은 알록달록 구슬 발을 헤치고 들어선다. 촤라락 경쾌한 소음이 손님 왔다고 알린다. 실내 전경만 봐도 맛집임을 알아차린다. 오래된 식당, 노포(老鋪)다. 오래 영업을 했다는 건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님들은 맛없는 짜장면은 팔아주지 않는다. 테이블이며 의자도 옛날 물건이다. 흔들거리는 테이블 한쪽 다리 밑엔 달력쯤으로 보이는 두꺼운 종이를 접어서 괴었다. 의자는 등 한가운데만 손바닥만치 폭신하고 나머지는 선득한 철제다. 테이블에 올라온 소품도 정겹다. 하얀 몸통에 빨간색 뚜껑 머리인 식초, 간장 통이 눈에 들어온다. 수저통에는 상아색 플라스틱 젓가락이 빼곡하게 누웠다. 가게 안 여기저기 눈으로 훑기를 잠깐, 금세 짜장면 한 그릇이 나온다. 그릇도 반갑다. 옛날 국민학교 앞에서 팔던 떡볶이 그릇, 녹색 얼룩무늬 플라스틱과 같은 재질이다. 적당히 넓고 얕아서 음식이 소담스럽게 담긴다. 금방 삶은 뽀얀 면발이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짜장 소스를 뒤집어썼다. 오이채와 완두콩이 장식을 맡는다.     


  십 년도 더 된 옛날 얘기다. 그날 맛본 짜장면을 잊지 못한다. 태어나서 최고로 맛있었다. 그 후 어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어도 그 맛이 아니다. 세련되고 비싼 중국집, 차이니즈 레스토랑은 더 취향과 멀다. 샛노란 단무지 안 주고 짜차이(갓의 한 종류인 개체(芥菜)의 뿌리를 말렸다 소금에 절여먹는 중국식 반찬)만 나오는 식당은 특히 별로다. 혹시 집에서 편하게 시켜 먹는 단골 중국집이 있으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차이니즈 푸드 노매드(chinese food nomad), 중화요리 유목민이다. 나는 여기다 싶은 중국집을 아직도 못 찾았다.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매번 다른 가게에서 주문한다. 그러면서 늘 실패한다. 아, 이 맛이 아니야. 아니라고.     


  가을볕이 좋아서 가족들과 캠핑을 갔다. 캠핑장이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점심에 뭐 먹을까 궁리하다 중국음식을 배달시키기로 했다. 오, 정말 주문이 된다. 살기 좋은 세상이다. 휴대전화로 손가락 몇 번만 누르면 집도 아니고 텐트 앞까지 짜장면이 배달된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빠른가. 짜장면 불러 먹는 것도 캠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논쟁 중에 음식 왔다고 전화가 울린다. 현찰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이미 신용카드로 결제한 상태다. 포장 뜯어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아직 그릇이 따뜻하다. 총알 배달이구나. 진짜로 살기 좋은 세상이다.     


  짜장면 그릇 비닐을 뜯는데 기시감이 코를 뚫는다. 예상치 못한 데자뷔다. 킁, 킁!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아보았더라. 온몸에 쾌감이 퍼진다. 입에는 저절로 군침이 돈다. 시장기와는 무관하다. 배고픈 것과 별개로 특출 나게 맛있는 냄새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으로 증명했다는 조건 반사 반응이다. 무의식에 뿌리내린 기억이 작동한다. 아, 이 냄새, 이 조화! 알 듯 말 듯 알쏭달쏭한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는다.     


  십 년도 넘은 해묵은 미스터리가 풀린다. 해답은 석유 냄새였다. 늦가을인 동시에 초겨울이라 캠핑에 등유 난로를 가져갔다. 낮에도 쌀쌀해서 난로를 피웠다. 불 붙이면 잠깐 동안 퀴퀴한 석유 냄새가 난다. 그 타이밍에 짜장면이 배달됐다. 비닐을 뜯는 순간 석유 냄새와 짜장면 냄새가 만난다. 십몇 년 전 대구 실내체육관 맞은편 중국집 홀에도 난로가 있었다. 프로농구 시즌은 겨울을 관통한다. 그날도 꽤 추운 날이었을 게다. 내가 맛본 환상의 짜장면은 식재료로만 빚어낸 맛이 아니었다. 이러니 답을 풀 수가 없지. 은근한 석유 냄새 속에서 허기를 달랜 것이 부지불식간에 반사 조건을 형성했다. 딱 옛날 그 중국집 맛이다.     


  묵은 난제를 해결하고 덤으로 사소한 교훈도 하나 얻는다. 행복의 조건을 탐색하는 데 더 시야를 넓히기로 한다. 좋은 것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나쁜 것이 다 나쁘지도 않다. 좋은 재료와 조리법만으로는 추억의 진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보통의 석유 냄새는 두통을 일으킨다. 건강을 해치는 나쁜 물질이다. 중계방송을 앞둔 잠깐의 시간, 허기를 채우려는 급한 마음이 악취를 이겼다. 매캐한 석유 냄새가 금방 요리해서 나온 짜장면 냄새와 만나 특별한 미각의 조건을 만든다. 이제부터 문득 두리번거리게 될 듯하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고 즐겁다면? 언제고 다시 이 기쁨을 맛보고 싶다면? 좋은 것들만 눈에 담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주연만 기억하지 않겠다. 의외의 인물, 예상 밖의 상황, 혹시 불편하게 만드는 사물, 마침내 좋지 않은 요소들까지 세심하게 살피기로 한다.     


  답은 찾았다만 어처구니없는 과제가 더 생겼다. 이제 짜장면 맛있게 먹으려면 부러 석유 냄새라도 피워야 하는 건가. 반사의 조건을 바꾼다. 그때 그 중국집에 다시 배고픈 상태로 찾아간다. 이번에는 난로 끄고 짜장면 한 그릇 만들어주십사 특별 주문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 한데 그마저도 이제 영원히 불가능하게 됐다. 포털 사이트 지도를 거리뷰로 본다. 예전 중국집이 오래전에 없어지고 안 보인다. 그 자리에 키 큰 새 건물이 섰다. 중국집 주방장님께 너무 늦은 감사 인사를 보낸다. 주방장님, 당신의 짜장면은 최고였습니다. 특히 난로 옆에서는요. 당신 덕분에 오묘한 행복의 조건에 눈떴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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