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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10. 2022

광화문에 오면 국밥을 드세요

  여성 팀원 P와 점심 외식에 나선다. 구내식당이 있지만 명색이 상사인데 밖에서 한 끼 사 먹이고 싶다. 대단할 것 없이 소박해도 제법 맛있는 메뉴로. P야, 뭐 먹을래? 왠지 서양 음식의 토마토소스 맛이 혀뿌리에 스친다.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온다. 날씨도 으슬으슬 추운데 따뜻한 국물 어떠세요? 오, 국물. 나야 좋지. 다시 묻는다. 그럼 밥 먹을래, 면 먹을래? 예상이 거푸 빗나간다. 오늘은 밥이 당기는데요!


  국물에 밥이라. 대뇌 피질 기저부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칙 연산이 작동한다. 국물 더하기 밥은 국밥. P가 과연 그런 것도 좋아할까. 팀원 중에 가장 세련되고 유행에 밝으며 차가운 도시 여성의 표상에 부합하는 그녀가. 딱 떠오르는 곳이 있긴 한데 일단 들이대 본다. 음, 그럼 요 근처에 정말 맛있는 돼지고기 국밥 집이 있는데 한 번 가볼 텨? 부산에서 파는 돼지국밥이랑은 완전히 달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돼지고기를 썼는데 깔끔하고 개운하거든. 참, 거기 미쉐린 가이드 선정 맛집이다!

  P의 호기심을 자극했나 보다. 큰길을 건너 골목을 꺾어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그 끝에 신기루처럼 붉은 색 건물이 보인다. 하얀 간판에 정직한 글씨체만큼이나 직관적인 식당 이름을 붓글씨로 써놓았다. 광화문 국밥. 아래 작은 글씨로 본점. 여지없이 대기 손님들이 많다. 문 앞에 세운 대기 명부에 이름을 써넣는다. 우리 앞에 서너 팀 열 명 남짓. 후루룩 말아먹는 국밥의 메뉴 특성상 영업 회전이 빠르다. 십 분 정도만 기다리면 P의 이름이 호출될 것이다.


  입장을 허락받고 식당에 들어선다. P의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사람들로 북적이면서도 어지럽지 않다. 홀 가운데 빙 둘러서 앉을 수 있는 이른바 ‘바(bar)’ 좌석이 커다랗다. 그 둘레에 단둘이 혹은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놓았다. 혼밥의 시대에 기민하게 대응한 좌석 배치다. 창가 맞은편 하얀 타일 벽이 이채롭다. 고풍스러우면서 청결한 느낌을 북돋운다. 팀장님, 인테리어만 봐도 맛집 포스가 흐르네요. P의 일성이다. 안쪽 깊숙이 둘이 마주 보고 앉는 작은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종업원 이모님이 가시기 전에 주문까지 재빠르게 마친다. 국밥 둘이요!

  패스트푸드점에 비견할 속도로 음식이 나왔다. 소담스럽게 담은 백미 밥공기, 널찍하고 깊은 그릇에 담은 국 한 그릇, 깍두기 김치와 오징어 젓갈, 고추와 마늘 편에 쌈장이 테이블에 안착한다. 오, 이게 미슐랭 선정 국밥이군요! P가 핸드폰부터 들어 플래시를 터뜨린다. 응, 얼른 먹어 봐. P가 국물을 한 숟가락 뜬다. 크으, 너무 좋네요! 팀장님이 왜 깔끔하고 개운하다고 했는지 알겠어요. 근데 이게 정말 돼지고기 국물이라고요?! P가 자문자답을 잇는다. 그렇다니까, 나도 고개를 묻어 국물 한 술 뜬다.


  처음도 아니지만 이게 돼지고기를 우린 국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닭고기 육수 같은 맛도 느껴진다. 기름을 꼼꼼하게 걷어낸 닭곰탕 국물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맛이다. 서양 요리에 쓰는 치킨 스톡(닭의 고기와 뼈를 우려낸 국물, 또는 그것을 분말이나 고체 형태로 가공한 식재료)을 썼대도 믿을 정도다. 정말 닭 육수를 기초로 한 것인가 궁금해서 일전에 인터넷을 뒤졌다. 나 같은 궁금증을 가진 이가 더러 있었나 보다. 어느 정통한 전문가에 의하면 닭고기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흑돼지 앞다리와 살코기 부위를 사용해서 맛을 내는 거란다. 놀라울 따름이다. 이름 있는 위스키나 와인을 음미하면 과일, 견과류, 꽃향기가 난다. 그것 역시도 실제 그런 재료를 전혀 첨가하지 않고 순전히 원재료 하나로 술을 빚고 숙성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니까, 비슷한 이치 아닐까 싶다.

  하얗고 뽀얀 고기 고명도 맛본다. 어찌나 얇게 썰었는지 종잇장처럼 하늘거린다. 그만큼 부드러워서 새우젓에 든 꼬마 새우 두어 마리를 고기 한두 점 위에 올려서 먹으면 감칠맛이 음주 욕구를 자극한다. 아, 오후 회의만 아니면 딱 맑은술 한 잔인데! 아쉬움을 국물 한 숟가락으로 내려 보낸다. 앞에 앉은 P는 고기 고명이 벌써 많이 줄었다. 열심히 저작 운동을 마치고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한다. 팀장님, 저 원래 국물 건더기 이렇게 많이 안 먹거든요, 근데 여긴 정말 맛있네요! 그래, 천천히 먹어. P가 숟가락에 고기를 올리고 쌈장을 찍은 고추와 마늘 편까지 쌓아서 입으로 가져간다. 여기 오징어 젓갈이랑 깍두기 김치도 먹어 봐, 끝내줘.


  진짜로 그랬다. P는 입이 짧은 사람이다. 팀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늘 가장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릇 안에 남긴 음식이 반 이상인 때도 있었다. 만 원짜리를 사주면 삼사천 원 어치만 먹는다고 장난스럽게 핀잔을 준 기억도 있다. 그런 P가 오늘은 처음으로 밥값이 아깝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다. 입에 잘 맞느냐 물었다. “팀장님, 저 실은 국밥 굉장히 좋아해요. 저 이제부터 가끔 밥 사주실 때 파스타 같은 것 말고 이런 거 사 주세요.” 그러고 보니 P를 포함한 식사 자리 메뉴는 으레 피자, 파스타, 샐러드 같은 서양 음식 위주였던 듯도 하다. “그래? 진작 말을 해주지 그랬니. 그럼 이제부터 완전히 내 취향 중년 아저씨 메뉴로 간다! 각오해. ㅋㅋ” 선입견, 편견 같은 것들을 이래서 경계해야 한다. 차도녀의 파스타, 그것은 나의 지나친 고정관념, 메마른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걸 오늘 비로소 알았다. 광화문 국밥에서.

  P가 마지막 한 술을 뜨고는 벽에 붙은 메뉴판을 응시한다. 팀장님, 여기 다른 메뉴도 다 맛있겠어요, 연말 팀 회식 때 들르면 다른 팀원들도 좋아할 것 같아요, 한다. 나도 같은 곳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래, 수육, 피순대, 갈비찜, 대구 뽈살 조림 전부 다 맛나겠네. 그날 하나씩 다 주문해보자. 구내식당에서 느낄 수 없는 든든한 포만감을 만끽하며 외투를 입는다. 이리 줘, 계산서를 챙기는 P의 손에서 그것을 넘겨받는다. 주방에서 음식을 내가는 종업원 이모님들과 한쪽 어깨로 교차하며 계산대로 향한다. 이모님 쟁반에 분홍과 초록으로 알록달록한 음식 접시가 들렸다. 엇, 저게 명란 오이무침인가 보다. 우리 다음에 저거도 꼭 시키자! 예, 팀장님 좋아요!


  박찬일 셰프. 이곳 광화문 국밥의 창업주이자 대표이며 저명한 요리사다. 티브이 출연도 잦은 분이어서 얼굴도 낯이 익다. P에게 알려줬더니 누군지 안다는 반응이다. 맛있는 한 끼 정말 잘 먹었다. P가 맛있게 많이 먹어서 더 기분 좋다. 특히 오늘의 점심은 스테레오 타입, 그것의 위험성과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귀중한 학습의 장이 돼주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박 셰프님 덕분이다. 그가 이곳 광화문에 비싸고 담장 높은 ‘파인 다이닝’이 아니라 지극히 서민적이고 정확히 나의 취향인 ‘국밥집’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일이다. 그의 천부적 재능이 언제나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닿아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광화문, 음식 맛있는 식당 많고, 특히 노포부터 최신 레스토랑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미식의 성지다. 혹시 오신다면 그중에 ‘광화문 국밥’ 본점을 빠뜨리지 말고 들르시라. 뜨끈한 국물 호호 불어 보드라운 고기 고명과 함께 밥 한 술 뜨시면서 냉랭해지는 이 즈음의 어둑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워내시길. 가격도 한 그릇에 겨우 9천 원, 아 착한 식당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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