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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토막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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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08. 2022

눈썹이 낙엽처럼 쌓이고

  사무실에서 쓰는 컴퓨터 키보드가 있다. 첨단 기능도 있어서 케이블 연결 없이 무선으로 작동한다. 2년쯤 됐을까. 친구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낮에 퀵 서비스로 보내주었다. 여러분은 그런 친구 있으신지. 무선 키보드를 착불도 아닌 선불 퀵으로 일하는 사무실까지 즉시 쏴주는 친구가. 내게는 큰 자랑이다.


  그 키보드 자판 사이로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입으로 훅 불었더니 더 깊숙한 데로 들어가 버렸다. 뒤집어서 털어도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판을 뜯는다. 제일 큼지막한 스페이스 바부터 뜯어낸다. 손톱이 짧다. 서류 클립을 자판 밑으로 찔러 넣는다. 지렛대의 원리로 들어 올린다.


  다음 순간 외마디 탄식이 나왔다. 세상에나. 자판 뜯어낸 자리에 나의 신체의 일부였을 사람의 눈썹이 과장을 많이 보태서 ‘낙엽처럼’ 수북하다. 눈썹도 있고, 속눈썹도 있다. 지저분하다는 느낌보다 기이하고 괴이하다. 아니, 이 많은 눈썹이 어쩌다가 여기 이 좁은 그늘 밑에 모였을꼬.


  지난 2년의 시간이 타임 랩스로 흐른다. 중년의 사내 하나가 사무용 책상 앞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시선은 앞에 둔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 손목만 키보드 너비에서 오락가락한다. 손가락이 벌새의 날갯짓처럼 움직인다. 사내 등 뒤로 몇  번의 해가 뜨고 진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분다. 건물 밖 큰 사거리 차와 사람이 빛줄기처럼 흐르다 끊어진다. 다음 컷은 클로즈업 숏이다. 사내가 일에 집중하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다. 위태롭게 매달렸던 눈썹이 안경 렌즈와 뺨 사이 공간으로 흘러내린다. 볼에서 퉁겨진 그것이 컴퓨터 키보드 위에 떨어진다. 스페이스 바 위에 안착하나 싶더니 키보드 자판 사이 어두운 틈새로 빨려 들어간다.


  결말은 아직 편집 전이다. 새드 엔딩과 해피 엔딩 모두 있다. 슬픈 결말은 이렇다. 컴퓨터 앞에 사내가 끝내 그대로 망부석이 된다. 영구히 단단한 그 무엇이 되어 부동의 자세로 세월의 침식과 풍화를 맞는다. 해피 엔딩도 준비됐다. 석상 같던 사내가 의식을 되찾고 마침내 자리를 떨쳐 일어나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넓은 들판으로 걸어 나간다.


  정신 나간 공상은 여기까지. 현실로 돌아가자. 얼른 업무 마무리하고 집에 갈 준비하자. 불금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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