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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11. 2020

마트서 사온 전복을 위한 진혼곡

  마트에 갔더니 전복이 싸다. 전복 몇 마리가 들어있는 물주머니 하나를 얼른 카트에 실었다. 때깔 좋은 돼지 목살도 한 근 담았다. 보양식이 별건가, 집으로 돌아와서 불판 위에 함께 올렸다. 비 오는 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 앙상블은 고매한 예술 무대에서만 찾을 게 아니다.     


  가만히 전복 익는 걸 봤다. 옆에 누운 돼지고기야 이미 죽은 것이니 감흥이 있을 리 없다. 선홍빛 속살이 회백색으로 변하는 순간에도 그저 군침이 흐른다. 전복은 다르다. 살아있는 것이 죽어간다. 뒤집어 놓은 전복의 허연 몸통은 처음 얼마간 무던하고 침착하다. 그러다 점점 뜨거운 열기가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두꺼운 패각이 막아내지 못하는 순간은 기어이 찾아온다. 열의 진앙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뒤로, 옆으로 최대한 몸을 피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 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아니 사람 손바닥 반절 크기만도 못한 삶의 터전 안인 것을. 전복이 껍데기를 버리는 일은 없다. 그 또한 죽음의 길이다.     


  비 때문에 난리다. 사람만이 아니고 소도 고초를 겪었다. 티브이 뉴스를 보니 지붕 위에 위태롭게 올라가 있는 황소 무리가 나온다. 클로즈업 화면도 보인다. 안 그래도 슬픈 눈에 절망과 불안이 어린다. 쏟아지는 물을 피해 겨우 도망간 곳이 제 집 지붕이다. 비는 그쳤으되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는 여전하다. 지붕에 올라간 것들을 보며 소 주인도 망연자실하다. 그도 재앙의 진앙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했다. 소도 사람도 집을 버리지 않는다. 그 또한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무어든 태어난 것은 살아가며 불가항력을 겪는다. 이십 대 후반 시작해서 서른 중반에 끝난 나의 첫 직장 생활은 불판 위 전복과 다르지 않았다. 캠퍼스에서 꿈꿨던 정갈한 직업인의 세계는 거기에 없었다. 태어나 처음 만나본 본격적인 부조리와 불합리, 음모와 협잡, 경멸과 무시가 마그마처럼 나를 엄습해왔다. 최대한 멀어져 보려고 뒤로, 옆으로 물러났지만 사회 초년생에게 피신처는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껍데기를 버리면 전복은 죽는다. 내가 첫 직장에 냈던 사표는 불판 위에서의 죽음이었을까, 아닐까.     


  불가항력을 마주하는 전복의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방금 전까지 같은 물주머니에서 살았음에도 최후를 맞이하는 전복의 모습이 다 같은 건 아니다. 다른 전복은 모든 걸 받아들이는 듯  고요하고 엄숙하다. 분명 죽도록 뜨거울 텐데 미동도 없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소신의 공양을 이루는 위대한 노승을 보는 듯하다면 심한 과장일까. 침몰하는 함교 안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방향타를 움켜쥔 타이타닉 호의 선장도 잠시 어른거린다.     


  그렇더라도 난 치열하게 몸부림친 그 전복에게 진혼곡을 바치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듯이 생의 마지막까지 저항한 영혼 앞에 고개를 숙인다. 지붕 위에 있었던 소와 그 주인, 벽과 천정이 허물어진 많은 이들에게도 마음 깊은 위로를 보낸다. 오래전 생업의 첫 현장에서 방황하고 외로워했을 나에게도 이제 위안을 전한다. 끝으로, 그 전복이 내세에는 무거운 껍데기를 이지 않아도 되는 그 어떤 자유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길 염원한다.

          

덧말) 돌아오는 말복날 전복 삼계탕은 못 먹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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