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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9. 2020

시청 앞 그리마

  시청 앞에서 마주치기에 적당한 존재로 무어가 있을까. 시청 앞 벤치? 시청 앞 나무? 시청 앞 참새? 아,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더랬다. 말이 나온 김에 노랫말을 더듬자면 이렇다. 노래의 화자는 시청 앞 지하철 역 가판대에서 신문을 산다. 그러다 저만치서 오는,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여인을 알아본다. 잠시 반갑게 인사와 살아온 얘기를 나눈다. 그녀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여전히 그녀만의 성취를 위해 애쓰고 있다. 조우는 잠시였고 그녀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젊어서 공유했을 그 시절 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대강 그런 줄거리다. 오래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멀리 향하던 두 개의 선이 점으로 아주 잠깐 만났다 멀어진다. 나는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엊그제 그리마와 마주쳤다. 앞서 소개한 노래 제목이 선사하는 묘한 향기가 무엇 때문일지 생각해본다. 시청이라는 낱말이 가진 일상성, 별다를 것 없는 공간에서 마주친 특별한 존재, 그 절묘한 대비가 신비감으로 귀결되는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내가 만난 그리마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얼른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 산책을 즐긴다. 덕수궁 돌담길을 휘감아 돌고 회사로 돌아오기 위해 시청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렇게 건너와서 시청 앞 잔디광장 옆 보도블록에 들어서는데 그리마 한 마리가 길을 지나고 있다. 그렇다. 말 그대로 백주대낮에 사람이, 평일이면 주로 근처 회사원들이 지나는 그 길을 그리마가 걷고 있었다.     


  헌데 그리마를 아실랑가 모르겄다. 충분히 징그러운 인상을 가진 벌레의 한 종류다. 어릴 때 어른들이 ‘돈벌레’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이 이름으로 쉽게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다리가 어마 무지하게 많다. 다리 많은 것으로는 지네와 수위를 다툰다. 몸통은 갈색과 회백색이 섞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다. 마주 선 것만으로, 피하고 싶다, 피해야 한다는 직감을 가지게 만든다. 어려서 저 용모와 귀한 ‘돈’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는데 다 커서 의문이 풀렸다. 인터넷에 어느 곤충 전문가가 남긴 지식을 엿보자니 그리마는 따뜻하고 습한 환경을 좋아한다. 가난한 시절 보통의 가정집은 난방의 개념이 전무했고, 추운 계절 집 어느 구석에 저 그리마가 출몰한다는 건 적잖이 실내가 따뜻하단 소리다. 돈깨나 있는 사람들만 이따금 보는 벌레, 그래서 돈벌레라는 닉네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서글프고 안쓰러운 작명.     


  그리마를 자주 목격하진 못했지만(아, 내 삶은 이다지도 곤궁한 것인가?!) 부티나는 별명도 그렇거니와 여타의 해충과는 차별된 느낌을 준다. 바퀴벌레는 어떠한가. 티브이에 나온 인기 여가수가 들려주었던 가난한 어린 시절 얘기가 인상적이다. 그녀가 연습생 시절 낡은 단칸방에서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사사삭’ 소리가 들린단다.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으슥한 곳으로부터 걸어 나오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다. 기실 나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 오래된 시영아파트(시에서 지은 아파트라는 뜻임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에 살 때 어느 겨울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내 방 불을 켰다. 그러면 가끔 혼비백산하여 어두운 장롱 밑으로 달음질하는 바퀴벌레를 본 기억이 있다. 광명을 피해 음침한 곳만 기웃거리는, 어느 고약한 것에 중독된 환자와 닮은 모습이랄까. 그리마는 다르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리마는 그런 바퀴벌레를 잡아먹는다. 어떤 이는 누가 봐도 해충인 바퀴벌레의 천적이라 하여 돈벌레를, 그리마를 익충으로 칭송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단다.     


  내가 시청 앞에서 본 건 숭고한 기개와 의지였을까. 내가 만난 그리마는 바퀴벌레처럼 음습한 데를 찾아 허둥거리는 인상이 전혀 아니었다. 비단 바퀴벌레가 아니어도 그렇다. 뜻밖의 환경에 노출된 벌레들은 몸을 피신키 위해 공간의 모서리로 고개를 쳐 박는다. 행여 뚫린 길이 보이더라도 최대한 구석으로만 내달린다. 그리마처럼 큰길의 정가운데를 가로지르지 못한다. 그리마가 군자대로행의 또 다른 표상이라면 큰 과장일까. 심지어 그때 그 그리마는 나처럼 한가로이 산책 중이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만나야 할, 즉 비즈니스 미팅 상대가 시청 건너편 북창동 골목쯤에서 기다리고 있고 그와의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분위기였다. 분명히 그랬다. 그야말로 바쁜 걸음이었다. 그 많은 다리를 빠짐없이 단속하며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찰나에 확인한 그리마의 얼굴 표정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마의 얼굴을 본 적이 있으신가. 몸통과 다리의 복잡한 생김새와 달리 아주 반듯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포털 사이트의 백과사전에 나온 삽화를 참조하시라. 내가 본 그리마는 거기에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눈빛이었다.     


  그리마의 삶이라고 고달프지 않겠느냐만 그 기개와 의지만큼은 참으로 닮고 싶다. 나의 못난 과거를 돌아본다. 그저 음침하고 은밀한 쾌락에 탐닉하며 몰두하지 않았는가. 그러다 중독에 가까워져 도무지 끊어내지 못하고 마침내 굴종한 적은 없었는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시선 밖으로 숨으려고만 애쓰진 않았던가. 명확한 목표를 향해 한눈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본 적은 있는가. 자문의 끝에 고개만 가로젓는다. 그랬던 일이 추호도 없어서 하는 부정의 뜻이 아니라 온통 그런 행위로 점철됐기에 저절로 나오는 부끄러운 긍정의 고갯짓이다. 그리마와의 짧은 조우는 오후 업무를 시작하는 내게 긴 여운을 남겼다. 얼굴 표정부터 단정하게 만들어본다. 시옷자로 느슨하게 풀린 입 꼬리를 추스른다. 탄력 없는 볼 근육도 실룩거려본다. 눈썹을 가지런히 정렬하고 눈에 힘을 준다. 양치를 하려고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걸음걸이를 살펴본다. 내 다리는 겨우 두 개뿐. 어깨를 펴고 힘차게 발을 찬다. 세면대 거울 건너에 서있는 얼굴이 자못 비장하다.     


  그리마의 미팅은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북창동 언저리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뭘 했어도 했을 것이다. 먹이를 잡았어도 잡았을 것이며 새 은신처를 찾았어도 찾았을 것이다. 내 ‘그리, 마’ 다 될 줄 알았다카이, 사투리로 된 진절머리 나는 언어유희를 속으로만 되새긴다.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돈벌레를 보면 재물운이 따른다고. 이름과 직결된 단순한 연상일 수 있다. 앞서 이름의 유래에서 보았듯이 그리마가 나오는 집이라면 제법 잘 사는 집안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재물이 많은 사람일 테니까 인과의 관계를 간단하게 뒤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다소간 징그러운 생김새와 만났지만 그 날 오후 기분만큼은 괜히 나쁘지 않았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퀴의 천적이 그리마이듯, 돈벌레의 그것이 또 어떤 생물일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모쪼록 그 날 그 그리마가 왕성한 먹이활동으로 대대손손 번성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 바쁜 몸 하나라도 잘 건사하여 오래도록 건강하길 기원한다. 아, 그러고 보니 아내가 나를 우리 집 돈 먹는 돈벌레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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