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었다. 왠지 느낌이 싸하더라. 지난 2월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네 번 호명되는 날, 나는 묘한 시공간의 왜곡을 느꼈다. 감독 본인은 ‘로컬 영화제’에 지나지 않느냐 반문했다지만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리라 짐작했던 수상 결과다. 내 살아생전 대한민국 영화가 오스카상을 타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진짜로 몰랐다. 열광에 동참하던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음을 알아차렸다. 공기의 냄새와 질감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무언가 바뀌고 있다. 이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린 건 지구에 오직 나뿐인 걸까.
그날 시작된 시간선(Time line)의 변화는 기어이 점점 더 큰 진폭으로 맹렬하게 나아갔다. 보름 전에는 국내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다. 음반 산업 생태계를 잘 알지 못하지만 대단한 위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방송사 MBC의 해외 팝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디제이 배철수 씨는 랭크 소식을 전하며 진심으로 감개무량해했다. 배 씨도 본인이 수십 년째 진행하고 있는 팝 음악 프로그램에서 한국 노래를 오프닝 곡으로 소개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순간 나도 확신하게 됐다. 지구에, 우주에, 시간의 흐름에 분명히 뭔가 일어났다.
평행 우주론에 대해 얘기하겠다. 지식이 많지 않으니 큰 기대는 접어두시길. 과학 이론 중에 하나로 지금 실재하는 우주 말고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조건의 우주가 여러 개 더 있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론적 근거로 양자역학, n차원, 초우주 따위의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런 불경스러운 것은 멀리 치워두자. 한 마디로 지구와 닮은 다른 지구가 얼마든지 더 있다는 얘기다. 그 세계에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내가 있다. 내가 평행우주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실은 어느 거창한 과학 서적이 아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창작의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미국의 만화 출판사 마블, DC 코믹스에서 언급되는 ‘멀티 유니버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계의 스파이더맨은 20대 백인 청년인데, 다른 지구에선 10대 흑인 소년이 거미 가면을 쓴다. 우리 지구의 슈퍼맨은 위대한 영웅이지만 저 세상에선 그가 최고의 악당이다.
시간축의 변화는 좋은 면만 가진 게 아니어서 뜻밖의 재앙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한국 영화의 아카데미 수상이 있을 때쯤 뉴스 비중이 점점 커지던 중국발 유행병이 ‘코로나 19’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세계는 ‘코로나 월드’다. 엊그제 퇴근길, 고된 하루를 넋두리하던 친구의 메신저 연락이 평행 세계에 왔음을 다시 자각하게 한다. “뭐라도 사 갖고 들어가서 막걸리에 한 잔 하고 자려는데 문 연 가게가 없네.” 너무나도 달라진 일상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것이 아포칼립스의 전주라면 울고 싶을 지경이다. 몇 달 전 저녁 뉴스 앵커가 전한 의료 기관의 브리핑은 충격적이다 못해 가슴 아팠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단다. 외화 <스타트랙>의 한 장면처럼 하늘에서 별안간 노란빛이 내려와 내 일상과 추억, 그리고 나 자신이 지옥문이 열려 있는 평행 세계로 강제 전송된 기분이었다. 아니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 찰턴 헤스턴이 이야기 말미에 느꼈을 감정과 더 닮았겠다. 지구로 향하던 중 불시착한 행성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려는 찰나 그는 자기 발밑에서 폐허가 된 자유의 여신상 머리통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저쪽 평행 세계는 무사할까. 그 지구에서 열린 2020 올림픽에서 한국은 몇 개나 금메달을 얻었을까. 학교 담 너머 교실과 운동장에서 들리는 기분 좋은 소음이 오늘도 동네마다 골목을 채우고 있을까. 저녁 번화가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넥타이를 풀고 거나하게 취한 회사원 무리들은 2차로 시원한 생맥주를 외치고 있을까.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에선 휴가로, 아니면 비즈니스 차 떠나는 승객을 가득 태운 이 나라 저 나라 국적기가 지금도 줄지어 뜨고 내리고 있을까. 그 지구의 나는 답답한 마스크를 벗고 가을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고 있을까.
만화 속 평행 세계에서는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을 구한다. 전의를 잃고 싸구려 술에 절어 지내는 배 나온 스파이더맨을 저쪽 지구에서 건너온 당돌한 꼬마 스파이더맨이 다시 일으킨다. 배트맨도 배트맨을 돕는다. 부모를 잃고 박쥐 가면을 쓴 배트맨이 저쪽 세계로 건너 가 반대로 아들을 잃은 중년 배트맨과 힘을 합친다. 악당이 된 슈퍼맨을 물리치기 위해 온 우주와 평행 세계의 슈퍼 히어로 수십 명이 그 앞에 맞선다. 여기 코로나 월드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로나 19가 아니라 ‘코로나 09’쯤을 일찌감치 겪어낸 지구의 정은경 중앙 방역대책본부장이 하얗게 김이 나는 아이스박스에 백신과 치료제를 담아 차원의 문을 열고 나오는 상상까지 해본다. 배경음으로는 영화 <아마겟돈>의 주제가로 쓰인 밴드 에어로스미스의 노래가 흐르면 안성맞춤이겠다. 정 본부장께서는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처럼 느린 걸음과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오시라.
평행 지구의 나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코로나 없는 세상에서 불금의 저녁을 기대하며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한심하게도 또 다른 지구에서 사람 많은 데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 진즉에 확진자가 되어 있으면 어쩌나. 난 평행 세계의 건너편으로 내 자신을 구하러 갈 주제가 못 된다. 여기 이 지구에 서서 얌전히 방역 당국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면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게 분수에 어울리는 일이다. 어느 평행 세계와도 연결되지 않으면서 독립된 줄거리를 가진 작품을 ‘스탠드 얼론(Stand alone)’이라고 부른다. 나 스스로를 구하며 코로나에 대처하는 나만의 스탠드 얼론 무비를 도모해봐야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