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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25. 2023

기꺼이 꼰대가 되겠다

  댕. 마음속 타임 벨이 울렸다.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카운트. 겨우 세 번만 참은 것도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적어도 수백 번은 자제하고 인내했을 터다. 나는 탐탁하여 기쁜 마음으로 꼰대가 되련다. 내가 그 고역을 자임하겠다.


  “안녕하세요, 인턴사원님들. 우리 최소한 인사는 하고 지냅시다. 벌써 출근 한두 달 됐죠? 회사 로비며, 탕비실이며, 지금처럼 화장실 오가는 복도며. 암만 마주쳐도 인사들 안 하시대요. 일전에는 내가 먼저 인사했는데도 그냥 지나치고 말이죠. 근데 우리 엊그제 달마다 돌아오는 본부 화상 워크숍에서도 봤잖아요. 인턴사원님들도 내가 누군지 알고, 나도 인턴사원님들 누구누구인지 알고. 아무리 요즘 직장생활이 삭막하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랬을 거라고 믿어요. 인턴 수료증, 이력서에 들어갈 경력사항 한 줄 물론 귀중하죠. 한데 그런 것보다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관계, 그 안에서 내가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 이런 걸 미리 배워가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생전 말 한마디 섞을 일 없는 인접부서 팀장이 뜨끔한 소리까지 했으니 무척 놀랐겠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어투, 아니 심지어 평소 나답지 않은 부드럽고 나긋나긋 어조였다고 자평한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발화자인 내 생각이고 수용자인 인턴사원들에겐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안한 마음이 아주 없진 않지만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알려주었어야 하고 나로서는 이것보다 완곡한 방법은 알지 못한다. 놀란 만큼 분명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웃 부서는 반년마다 졸업 전후의 대학생 인턴사원을 서넛 뽑아 업무에 긴요하게 투입시킨다. 그럴 거면 인사부서에 정식으로 요구해서 정규직을 쓰지. 의아했지만 남의 사정이므로 더 관심두지 않았다. 여하간 그러기를 서너 해. 지금까지 도합 스무 명은 족히 그 팀에서 인턴 기간을 마쳤지만 오며 가며 인사하는 이를 좀체 보지 못했다. 그것이 처음부터 거슬린 것은 아니었다. 담장 하나만 넘으면 생판 남인 것이 회사라고 다를쏘냐. 그 인사받는다고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타인들, 나와 우리 팀에 직접적인 피해만 없으면 그뿐이었다. 편하게 남남으로 지금처럼 지내자 여겨왔다.


  딱히 심기가 뒤틀리지 않았다. 비교적 무탈하고 평안한 회사 생활이었다. 도리어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원 스트라이크. 로비에서 승강기를 기다리는데 그 팀 인턴사원들이 보인다. 가벼운 시위였을까. 내 쪽에서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는데 반응이 없다. 투 스트라이크. 탕비실에서 정수기 물을 받는 중인데 인턴사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역시 인사 같은 건 없다. 그냥 편의점에서 라면 물 기다리는 뜨내기손님들 같은 사이다. 쓰리 스트라이크. 화장실 오가는 복도가 넓지 않다. 또 다른 인턴사원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데 역시나 시선은 정면만 고정이다. 하.. 삼사 년이면 많이 참은 거지?


  그 부서 팀장을 먼저 알현했다. 그녀와 별다른 트러블 없이 완만하게 지낸다. 파티션 너머로 보니까 하루 중 잠시 여유 있어 보였다. “팀장님, 잠시 시간 있으신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심각한 건 아니고요.” 흔쾌히 하체를 일으켜 함께 회의실로 이동했다. 어제오늘 일 아니고 적어도 몇 년은 지켜보았다, 인턴사원들 인사 안 하더라, 나한테만 그런 거도 아니고 다른 본부원, 그러니까 타 부서 팀원들과도 그렇게 지내는 것 같더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텐데 팀장님 지도 편달이 필요해 보인다, 아주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달했다. 일 년이면 두 번씩 상냥하신 본부장이 이끌어서 본부원들 업무 와중에 굳이 일으켜 인턴사원들 수료증 받을 때 손뼉 치게 하시지 않느냐, 아무 느낌 없이 지내다가도 그때면 왠지 얄미운 마음까지 들더라, 생전 가야 인사 한 번 안 하는 이들 뭐 좋으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더라, 굳이 덧붙였다.


  그녀는 도량이 있는 사람이다. 아우 그러셨느냐,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내 탓이다, 자책한다. 나더러는 애정이 있으시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으로 이해한단다. 애정?! 누구를, 무엇을 향한 애정? 나는 서늘한 사람이다. 어지간한 것에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 나의 직업, 일터에 대한 작은 충성심이 있으나 그것이 오지랖 넓게 옆 팀 인턴사원들에게까지 향하진 않는다. 그러면서 시간이 걸릴 일이지만 이제부터 고민해 보겠단다. 아니, 그게 왜 그럴 일인가. 처음 출근하는 날 다른 팀 사람들, 본부원 모두와 인사 나누고 지내라고 간단히 당부하면 될 일 아닌가. 그 간단한 절차가 없어서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녀는 오해를 품은 걸지도 모르겠다. 인턴사원들과 친분을 맺자는 게 아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는 사이끼리 직급의 고하, 고용의 형태를 막론하고 서로 최소한 안녕, 인사는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러기를 며칠. 상황은 나아진 것이 없고 나의 회사 생활은 고요하며 인턴사원들은 여전히 인사를 먼저 하지도, 받지도 않기에 기어이 마음의 타임 벨이 울렸다. 저들 팀장에게 쪼르르 달려가 팀장님, 저기 저 아저씨가 우리한테 뭐라고 했어요, 일러바쳐도 하는 수 없다. 영판 모르면 몰라라, 직접 말 주고받는 것 아니어도 월례 워크숍에서 만나고 이제 반년 지나면 네들 나갈 때 또 마음에도 없는 축하 박수 쳐야 할 텐데 더는 그렇게 못하겠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탓이라지만 그것도 어디 꼭 그러하냐. 스물몇 살에 대학교씩이나 다니면서 고등 교육받았으면 그 정도 눈치, 인간적인 도리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야 되는 것 아니냐.


  기꺼운 마음으로 저 XX 꼰대야, 손가락질당하겠다. 나의 일터가 아래에서부터 망가져 가는 것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하겠다. 오해는 말아라. 사람의 위아래를 말하지 않는다. 회사는 엄연히 위계가 있는 조직이고 간부, 경영진으로 일컫는 의사 결정의 상층부는 나로서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 손에서 이루어지는 흥망의 조화까지 내가 손쓸 수 없다. 고용된 직원, 피차 영원한 을인 직제의 하부가 흔들리는 것만큼은 힘닿는 대로 막아볼 셈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는대도 상관없겠다. 적어도 나는 나를 지켜볼 테니까. 내가 보고 내가 아니까.


  인턴사원들아. 똑똑하고 우수한 네들이 어쩌면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회사는 회사의 미래가 신입 사원들 손에 달려있다고 말하지만 당장의 큰 기대는 없단다. 네들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점 채우고 나름대로 지금처럼 외부 활동 경험도 쌓았겠지만 솔직한 말로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있겠니. 그럴 때 네들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잘한다, 걔 괜찮더라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은 주위에 인사 잘하는 것, 딱 그거 하나뿐이란다. 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겠지. 암, 아마 그럴 거야.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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