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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30. 2023

나의 20대가 서있더라

  T야. 어제 너랑 만나는데 네 얼굴 생김으로 알기 전에 너 섰던 그리로 절로 눈이 가더라. 스마트폰 지도가 초행길 알려주는 대로 초점은 휴대전화 화면에, 주변 시야로 살피며 가던 길이었다. 여기쯤인가 모퉁이 도는데 어떤 파장이 심장에 와서 닿더라. 뜨뜻하고 환한 기운의 진앙으로 고개를 들었더니, 거기 나의 20대가 서있더라.


  얼마 만일까. 내가 장가들기 전이겠고 우리 애가 올해 중학교 갔으니 십 년 하고도 너덧 해는 지났겠다. 예식장에 와준 고마운 기억도 있다만 그때는 큰일 치르는 누구나 그러하듯 차분히 앉아서 얘기 나누지 못했다. 너랑 술잔 앞에 마주 앉는 것은 그만큼 오랜 일이다. 처음에 사당 어디쯤에서 보기로 했었지. 나는 일찍 서울 회사를 등질 수 있고 너는 용인 사무실에서 늦게 일이 끝난다는 얘기에 내가 좀 더 가야 하는 분당으로 바꾸었다. 세월의 강을 건너 만날 생각 하면 그깟 물리 공간의 거리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학 동기이기 전에 중학교 3학년 때 먼저 같은 반에서 너와 만났다. 그때는 지금처럼 가깝지 않았지. 무리에서 같이 어울리긴 했지만 속 얘기도 나눌 만큼 붙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 잘하고 늘 깔끔 단정한 데다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제법 있는 네가 나는 전혀 싫지 않았다. 그때 내 짝꿍이었던 안경 쓴 S 기억나냐. 걔가 너 좋다고 나 붙들고 너 뭐 좋아하냐고 수업 시간에 그렇게 성가시게 굴었다.


  그러다 네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은 대학교 대운동장에서였다. 떨리는 손으로 수험번호를 전화기 버튼으로 누르면 아직 합격자 명단이 등록되지 않았다며 미리 녹음된 목소리가 나오던 겨울이었다. 아침부터 수십 번은 전화를 걸었을까. 내내 같은 반응이던 전화기 너머에서 ‘조회 중입니다’ 멘트 뒤에 흐르던 몇 초는 그대로 억겁의 시간 같았다. 조악한 팡파르 연주에 섞인 ‘합격하셨습니다’ 한 마디에 집안 거실이 지구 밖으로 솟구쳐 오르더라. 그날 오후 모친 손을 이끌어 앞으로 오래 다녀야 할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야 나타나는 운동장 안에 지휘관의 사열을 기다리는 병졸처럼 웅장하게 줄 세운 대자보, 거기 큼지막한 검정 글씨로 쓰인 수험번호와 내 이름 세 글자. 비로소 정말 합격한 게 맞는구나 싶은 찰나 저기 떨어진 자리에 흔하지 않은 네 이름 T가 보이더라.


  입학 전에 하룻밤 자고 온 오리엔테이션에서 너와 동명의 다른 이는 없었다. 그리고 너도 없었다. 아마도 너도 한 대쯤 당연히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호출기 번호 역시 내 수중에 없었다. 그렇게 구십칠 년 삼월 삼일, 첫 수업인 회계학 원리 과목을 들으러 강의실을 더듬어 가는 복도에서 너와 만났다. 이야, Hoon아! 오, T야! 너 맞구나! 우리 대학 같이 다니게 됐구나! 손을 맞잡은 것까지였는지 가볍게 포옹까지 나누었는지, 그 길로 가방을 강의실 책상에 던지고 이제는 당당하게 담배 한 대 나눠 태우러 나갔는지까지는 연기 같은 기억이다.


  캠퍼스에서 다시 만난 너와는 중학교 시절보다 가까운 거리감으로 스무 살 청춘을 후회 없이 지냈다. 무엇을 주제로 했는지 상기할 수 없지만 뜨거운 젊음을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늦은 밤까지 학교 앞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대학생이 돼서 너와 처음 가 본 강남역 나이트클럽, 함께 나간 모 여대와의 미팅,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며 다녀온 며칠 낮밤 섬 여행은 지금도 선명하다. 신이 아닌 필부의 아들로서 너와 나 모두 군대에 다녀오고 이내 복학해서 달라진 교정에 새로 적응하던 때도 잊어버리기 어렵다. 이제는 모두 다른 사내의 안주인이 되었을 스쳐간 너의 인연, 나의 그것 역시 우리의 청춘에 아주 없던 일로 하기엔 미안하고 아깝다. 달콤 씁쓰름해서 좀체 먹어 없어지지 않는 안줏거리였다.


  너랑 한 날에 졸업했던 것 같진 않다. 나는 취업 재수를 해서 어느 방송사에 조연출로 일하게 됐을 때쯤 너는 회사를 그만두고 혈족인 형과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결혼도 네가 나보다 몇 해 일렀다. 너의 성혼을 축하하려고 대학 동기 몇이 모였고 그날도 나는 공연히 취했다. 신천, 지금은 잠실새내가 이름이 된 전철역 근처 돼지 김치찌개 집에서 너랑 단둘이 만나 찬 소주잔을 부딪친 것은 그날로부터 또 몇 해 지난 때였다. 월급이 아니라 오롯이 네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네가, 말이 번듯해서 프로듀서이지 조연출 막내로 선배들 틈새에서 전전긍긍하던 내게 따라주던 맑은 소주가 그 밤에는 그렇게 쓰더라.


  그렇게 오늘 다시 만났으니 대체 얼마만이냐. T야! 이야, Hoon아. 멀리 오느라 애썼다. 애쓰긴 뭘, 한걸음에 와지던 걸. 엊저녁 멀리 오는 대신에 네가 산다며 뭐 먹을래, 골라봐 하던 고기나 활어회, 아니면 참치회 중에서 나는 얼른 답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얼 먹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아무거나, 라고 입력하려던 찰나 네가 ‘양갈비?’ 보내더라.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너와 입장한 양갈비 전문점은 네모 테이블 없이 점원들 일하는 중앙을 빙 둘러 짝지어 온 손님들이 나란히 앉아 얘기할 수 있는 바(Bar)로 된 곳이었다. 오손도손 저절로 술맛이 나게 운치가 있더라.


  내가 미리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간 숙취 해소 음료부터 나누어 먹기를 잘한 것 같다. 이젠 우리 이런 것 챙겨 먹어야 돼, 세월은 하찮은 순간에도 무심히 기척한다. 요새 유행하는 대로 생맥주, 위스키 하이볼로 몸을 덥히고 대학 시절처럼 차가운 소주로 바꾸어 마셨다. 우리 때는 지금처럼 돌려서 따던 거 아니고 병따개로 열던 무시무시한 빨간 뚜껑 소주 아니었냐. 소름 끼치게 쓴 옛 소주 맛이 입안 점막에 맺히더라.


  네가 전에 하던 그 사업을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얘기가 그렇게 반가웠다. 나도 겸연쩍은 듯 네가 마지막 알던 방송사에서 아직도 벌이 한다고 응답할 수 있어 뿌듯했다. 생활의 형편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너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오래 버텼다는 사실만으로 대견스러웠다. 코로나 때는 좀 어땠어? 다행히 나 하는 일에 큰 타격은 없었어, 하는 얘기는 정말이지 감사했다. 네 마누라, 내 마누라, 네 새끼, 내 새끼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 꺼내 나누어 볼 때는 그것대로 세월이 실감되더라. 중학교, 대학교 때 에피소드들 하나둘 꺼내다 마침내 연결된 친구 녀석 목소리 스피커폰으로 들을 때도 극적이었다. 길 건너 일본식 선술집으로 옮겨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도 또 좋더라. Hoon아, 너는 다시 태어나도 제수씨랑 결혼하냐? 그딴 건 대체 왜 그 밤 나한테 물었냐. 차마 미안해서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아니,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련다, 내 팔목에 묵주 이거 안 뵈냐, 가톨릭엔 윤회란 없어, 대답했더랬다.


  너와 나는 끝내 노래방에도 어깨동무로 들어갔다. 알코올인지 논알코올인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 값이며 노래방 이용요금을 나오면서 치를 때에 주인장께 또 지갑을 들이미는 너를 내 부실한 어깨로 겨우 막아섰다. 너는 대학 때에도 내 노래를 아껴서 들어주었다. 지금도 나와 음색이 닮은 어떤 가수가 티브이에 나올 때면 Hoon이 네가 그렇게 눈에 밟히더라, 그 얘기에 공연히 흡족해서 웃었다. 그럴 때면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 내 핀잔까지 네가 마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대학 시절에 부르던 레퍼토리를 짧은 시간 생각나는 대로 너와 함께 불렀다. 우리 그래 목소리는 하나도 안 늙었더라. 공일오비 형님들의 ‘이젠 안녕’ 말고는 우리들의 마지막 노래로 더는 맞춤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하에서 올라와서는 어깨동무가 격한 포옹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Hoon아, 우리 자주 보자. T야, 그래 꼭 그러자. 너의 어부인 전화가 쇄도하는 와중에도 네가 애플리케이션으로 불러준 택시가 금세 당도했다. 내가 가는 거리에 따라 너의 지갑에서 요금이 지불될 예정이었다. 차에 올라 집으로 가면서 기사 아저씨께 친구가 불러준 택시 타고 귀가하는 길이라고 거푸 자랑했다. 내가 불러서 갈게. 스흡, 그냥 내가 부르는 택시 타고 가, 그렇게 하게 해 주라. 그 얘기가 얼마나 든든하고 기분 좋았는지 모른다.


  만원 전철에 올라 출근하는 길. 초등생 토끼 같은 여식 맛뵈라고 빨간 딸기가 팥소와 같이 들어있는 연분홍색 찹쌀떡 한 상자와 바꿀 수 있는 쿠폰을 너에게 보낸다. 함께 늙어가면서 우리 아직 많이는 늙지 않았다고, 여전히 청춘이라며 서로의 진짜 청춘을 기억하는 이와 마주하는 한 때, 그런 순간은 전쟁 같은 삶 속에서 잠시 총부리를 내려놓고 참호에 웅크려 어디선가 들리는 성탄절 캐럴에 눈을 감는 병사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나의 남은 삶 속에서 이런 순간이 문득 또 문득 찾아와 주기를 간절하게 소원한다. 그때에, 어제처럼 나의 20대가 두 팔 벌려 나를 반겨준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T야, 어쩌면 너는 ‘나의 20대’가 아니라 ‘20대의 나’ 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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