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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7. 2023

심리적 막노동을 위해 출근한다

  막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이다. 말 그대로 앞뒤 없이 ‘막’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본 글줄에 등장하는 막노동이란 낱말은 가치중립적인 쓰임이다. 낮잡거나 훼손할 의도로 일컫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필자는 벌이를 위한 세상의 모든 생업은 위대하다는 평소의 신념을 가진다. 그것이 타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만 아니라면.


  매일 아침 ‘심리적 막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마음의 가짐으로 출근한다. 심리적 막노동이란 무엇이냐. 육체적 막노동과 반대되는 의미로 쓰였다. 단단하고 두꺼운 육면의 시멘트 벽 안에서 여름에 볕 가리고 겨울에 눈비 피할 수 있는 비교적 안락한 여건에서 일하지만 마음, 심리, 정서만은 모질게 고된 노동,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이름 붙였다. 사전적 의미를 다시 가져와 풀이하면 스스로 마음을 돌볼 여유 따위 없이 닥치는 대로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회사 조직에서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업무는 애초에 내가 그렸던 경력 경로에는 아주 없던 것이다. 나는 지위보다 권한이 늘 아쉬웠다. 반드시 상급부서가 아니어도 좋았다. 회사가 소비자에게 내어놓는 주요 제품, 방송사에 속한 나로서는 시청자에게 선보이는 방송 콘텐츠의 소구 전략을 고안하는 선행부서, 그 일원으로서 계속 기능할 수 있길 바랐다. 방송도 사업임을 상기하면 콘텐츠 비즈니스 기획 분야의 첨병으로만 꾸준히 성장하길 기대했다.


  몇 해 전, 방송 기획 부서의 선임 팀원이던 나를 당시의 팀장이 따로 호출했다. “Hoon 피디, 곧 있을 정기 인사발령에서 자네는 이동수가 있어. 이웃한 팀으로 가서 거기 팀장을 맡게 될 거야. 특별히 미리 귀띔해 주는 거니까 대비하라고.” 뜻밖이어서 놀랐고 좋았고 좋지 않았다. 천재지변이 아니면 영구히 팀에 남을 줄 알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인사이동이어서 놀랐다. 언감생심 그려본 적도 없거늘 승진의 기회를 준대서 찰나는 좋았다. 한데 옮겨 갈 팀이 후행 부서이고 의사 결정의 단초를 마련하는 기획의 기능은 별로 없이 관리와 현상 유지가 과제인 곳이라 마뜩잖았다.


  결론적으로 싫었다. 당시의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회사가 저를 한 계단 높은 곳에 두려고 한다는 좋은 소식을, 그것도 미리 알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네가 적임자라는 까닭도 감사하고요. 그런데 제가 그쪽 분야를 잘 아는 건 제가 가진 여러 자질 중에 겨우 하나일진대 오직 그것만 핀셋으로 뽑아내듯 키우고 나머지 다른 장점은 불능의 상태로 거세시키는 게 저라는 구성원 개인에게도, 회사 차원에서도 맞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팀장은 수긍하면서도 다른 결론을 언급하진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온 게 오래전이다. 조직이 결정하면 개인은 실행한다, 나의 평소 직업 신조이기도 하므로 달리 결과가 도출될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회사원들이 흔하게 입에 굴리는 말이다. 나는 절을 떠나 다른 절로 향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 중도 뭣도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저스트 두잇. 그냥 했다. 자꾸 마음을 쓰면 괴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업무만 돌볼 재목이 아닌데, 깃발을 휘날리며 올라가 저기 언덕에 꽂고 ‘모두 이곳으로!’ 외치는 게 내 몫인데, 연연할수록 연연하게 되어서 내가 나를 망칠 것 같았다. 단념한다. 무념과 무상의 상태로 나아간다. 무엇보다 나는 한 여자와 한 아이의 울타리가 돼야 하는 가장이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나보다 먹고사는 벌이가 지상의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다른 건 다 그것 뒤로 엎드린다. 관리와 현상 유지가 이제부터 너의 소명이라고? 누구보다 아싸리 하게 해낼 테다. 그 안에 작지만 기획하고 도모해야 할 업무가 보인다. 나는 그것까지 찾아내고 들추어서 예쁘게 살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권한으로 최대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셈이다.


  배우 안재홍 씨가 최근 출연한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의 드라마를 보았다. 그의 연기는 놀라운 것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커리어 하이인 그가 어쩌자고 주연도 아닌 그런 작은 배역을, 화면 안에서 모두가 꽃이 되려는 아귀다툼이 당연한 세태 속에서 흉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용모의 인물을 연기하겠다고 약속했을까. 그 약속을 너무나 훌륭하게 실행해 낸 결과물을 보면서 그가 자신의 직업을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는지 만져질 듯한 질감으로 더듬게 되었다. 내 마음속 올해의 연기 대상은 배우 안재홍으로 나는 몰래 낙점했다.


  벌이를 위한 세상의 모든 생업은 위대하다. 우리를 오늘에 이르게 한 적어도 오 할 이상은 누군가의 막노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지켜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보다 숭고한 것은 세상에 없음을 뜨겁게 상기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적어도 내가 나를 보고 있기에 오늘도 작은 세목과 말단을 끝까지 완성하는 너와 나, 우리를 위해 부서져라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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