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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14. 2023

입학 동기 여러분께

  오늘 퇴근하면 아주 옛날 학부를 졸업하고 얼마 전 대학원으로 진학한 모교 앞 주점가로 향한다. 신입생 동기로 묶인 이들과 처음 인사 나누는 저녁 자리가 마련돼 있다. 학급 대표로서 모임을 거행하며 첫 일성으로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나는 유비무환의 효용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유의 파편을 아래와 같이 갈무리해 본다.




  우선 입학식과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지 못한 저를 회장으로 선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늘 동기님들을 향해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실망시키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어떤 말씀을 드릴까 궁리하다 이런 얘기는 어떨까 싶었습니다. 제가 올해 마흔몇 살 쯤인데 나이 들수록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 즉 결정할 수 없고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이 인생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는구나.’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겠죠. 크고 작은 물건을 구입하거나 직장을 선택하거나 취미를 고르거나.


  그런 것들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 심지어 한 번 결정되면 더는 기회가 없는 것들. 성별, 부모, 국적, 무엇보다 이 무한대의 우주에서 한 톨 먼지 같은 지구에 태어나는 것 같은 일들은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지만 앞에 열거한 것들보다 비교도 안 되게 크고 어마어마한 영향을 우리의 인생에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적어도 절반 이상 결정짓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곳 OO대학교를 선택했지만, 뭐 학교도 우리를 선택한 측면도 없진 않지만, 그러니까 학교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지만 이 자리에 모인 열다섯 동기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요. 다시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제부터의 우리의 삶에 서로가 어떤 큰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그래서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오늘의 첫 만남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동기 사이가 나이와 경력을 떠나 모두 수평적으로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것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존중과 예절은 당연히 갖추어야겠지만 만나서 명함 주고받고 그것 이상 거리 좁히는 일은 없는 예의 ‘나이스’한 관계가 아니길 바랍니다. 깨복쟁이들처럼 어울리면서 금세 친해져서 어느 저녁 퇴근길에 어울려 인생 얘기하며 소주 한잔 부딪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제부터 한 분 한 분 자기소개의 시간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시는 일은 단체 채팅방에서 한번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학교 진학의 동기나 이유는 꼭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방송사에서 이십 년 가깝게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진학의 이유는 3년 전에 MBA를 졸업했는데 무언지 모를 결손감이 있었고 학부 때 부전공한 신문방송학을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말씀으로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모교 캠퍼스에 돌아오고 싶은 철없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 진짜 진학 동기입니다.


  오늘 운영 방침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회장으로서 제가 시간을 재겠습니다. 적당한 시점에 앉아계신 자리를 뒤섞어 테이블을 정비할 셈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전방위적으로 여러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옮겨가실 때 사용하던 수저와 술잔은 함께 챙겨가 주십시오.


  우선 클래식하게 건배사 하나 외치겠습니다. 제가 ‘OO대학교 언론대학원 **기!’ 선창 하면, 여러분들께서 ‘반갑구나!’ 외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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