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녀왔다. 동네 의원 말고 큰 대학병원. 어려서 앓던 천식이 재발했단다. 어른 되면 낫는 병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다 큰 어른도 면역력이 약해지면 도로 앓을 수 있단다. 파란색 흡입기를 처방받았다. 유년시절 친숙한 무엇이 타임머신을 타고 건너온 듯했다. 아주 반갑지는 않았다.
끌고 온 차로 되돌아간다. 병원 옥외 주차장 옆에 흡연공간이 있다. 그 멀찍한 건너편이 응급실 입구다. 택시 한 대가 섰다. 노모와 중년의 여인이 내린다. 누가 환자고 누가 보호자인지 금세 알 수 있다. 거푸 기침을 하는지 할머니 등허리가 들썩인다. 길 건너로 생체 카메라를 패닝 한다. 공중에 거기 모인 머릿수만큼의 허연 연기가 오른다. 타인의 폐병을 알 리 없는 각자의 회한이 날숨에 섞인다.
병원이야말로 세상의 축소판이다. 군대가 그렇다고? 이등병 때 어느 고참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2년 2개월 지내면 인생 노하우는 거저 얻는다고. 개가 웃을 소리다. 생로병사는 군대 내무반이 아니라 병원에 있다. 환희와 절규가 불과 몇 겹 콘크리트 벽 사이로 대비된다. 갓난아기의 첫 숨과 망자의 생애 끝 숨이 찰나에 겹친다. 퇴원하는 이가 방금 걸어 나온 길로 병마와 긴 싸움을 앞둔 새로운 운명이 입장한다. 아픈 이가 네모진 쟁반에 나온 밥으로 생명을 이을 때 고치는 이가 비슷한 모양새로 끼니를 때운다. 요즘 병원은 저잣거리까지 품고 있어서 갖가지 물건이 사고 팔린다. 오락시설이 조금 부족할 뿐이다. 태어나 죽는 모든 인간, 그들이 사는 세상이 빨간 십자가 밑에 있다.
폐병 환자와 흡연자가 공생하는 인간 세상이 거기 있다면 천국은 어디와 닮았을까. 나는 공항을 떠올린다. 으레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는 충돌과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갈수록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 같은 건 나는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학교, 은행, 관공서, 운동경기장, 놀이공원, 사람이 모였다 하면 싸우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다. 심지어 절간 같은 도서관에서도 봤다. 쉿, 조용히 좀 하세요! 남이사!
공항은 다르다. 지구 상에서 인간 종자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일진대 여간해서 마찰이 일지 않는다. 모두가 만면에 희색. 짐 부치는 탑승객과 접수하는 항공사 지상 직원처럼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도 그렇다. 모두가 모두에게 친절하다. 그럴 일도 잘 없겠지만 사소한 충돌이 생겼다고 치자. 예컨대 끌고 가던 캐리어끼리 부딪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 일이다.
천상의 미소는 어디에서 왔을까. 여행에 달뜬 마음 때문이리라. 잠시 후면 나는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난다. 그곳으로 날 데려 갈 비행기에 곧 몸을 실을 것이다. 돌아올 것을 미리 걱정하며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 법. 짧다면 몇 날 며칠일지언정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은 없다. 초연한 태도는 여유와 친절까지 부른다. 바벨탑이 끝내 완성되었다면 현시대의 공항 같은 풍경이리라.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한 인류의 언어가 섞이는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대단히 나이스 하다. 위 아 더 월드!
몹쓸 역병만 아니면! 난 작년 이맘때에 베트남 유경험자가 돼있어야 했다. 요 전에는 일본 여행이 유행이더니 어느새 베트남이 대세가 되었다. 나도 빠질 수 없지. 치밀한 준비 끝에 항공권과 호텔을 알차게 예약했었다. 분 단위, 아니 초 단위 일정으로 몇 박 코스를 짜두었더랬다. 식도락 없는 여행은 앙꼬 없는 찐빵. 삼시세끼가 아니라 삼시열 끼도 마음먹었던 나다. 몹쓸, 빌어먹을 유행병이 다 망쳐놓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예약 취소 버튼을 눌렀다. 공항으로 갔어야 할 내가 이제 병원에 다닌다.
두 달 뒤 다시 병원에 오란다. 그때 즈음 저녁에는 대여섯 사람쯤 모여도 별일 아니면 좋겠다. 곧 선선한 바람도 불어오겠지, 꼼짝없이 공친 여름을 떠나보내며 내년엔 다르겠지, 공항 가볼 수 있겠지 하는 얘기도 곁들이겠지 싶다. 아, 이 분위기에 맞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병고 끝에 병원서 돌아가시고 살아생전 비행기 한 번 못 타셨는데. 비행기 탈 일 없으니 공항 근처도 못 가보셨을 터인데. 할머니, 천국은 공항과 비슷한가요. 아, 우리 할머니 공항 못 가봤으니 잘 모르시겠네. 혹여 공항 같더라도 공항 검색대 같아서는 안 되는데. 거기서는 승강이하는 사람 몇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