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회사에서 해주는 건강검진을 받았다. 마흔이 넘어가니까 매년 돌아오는 건강검진이 마치 시험 치르는 것 같다. 공부는 눈곱만큼도 안 했는데 성적은 좋았으면 좋겠다. 걷고 뛰고 술 약속 줄이고. 거사 앞두고 벼락치기라도 해보는데 그게 통할까 싶다.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는다. 서른 초반에 기척을 알린 지방간이 이제 완연한 위용이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차마 끊지는 못하겠고 줄이자, 술.
본능적으로 대안을 탐색한다. 저녁 뉴스를 보는데 무알콜 맥주 시장이 활황이라는 리포트가 나온다. 그래, 저거다! 인터넷으로 스물네 캔 들이 두 짝을 주문했다. 성인인증을 거치면 간단하다. 맥주인데 술은 아니어서 가격도 착하다. 삼백삼십 밀리리터 한 캔에 천 원도 안 되는 꼴. 그냥 탄산음료 값. 이틀 뒤 퇴근하니 문 앞에 육중한 택배 상자가 버티고 섰다. 힘써서 집 안으로 들인다. 택배 기사님 죄송합니다.
어서 언박싱 하고 싶다. 맛이 어떨까 궁금해 못 견디겠다. 진짜 맥주 같을까. 그렇다고 상온에 방치된 미지근한 걸 마실 수는 없고. 잠자는 뉴런을 깨운다.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다. 캔 맥주 얼른 차갑게 하는 법. 물티슈를 캔에 감아 냉동실에 넣어둔다. 그사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무알콜 맥주가 처음은 아니다. 칠팔 년 되었나. 회사에서 일박 워크숍을 갔었다. 후배들이 술과 음료를 추진해왔다. 결정적 실수가 있었다. 서두른 탓인지 맥주가 무알콜이었다. 그나마 소주는 제대로 사 왔다. 무알콜 소주는 세상에 없으니까. 소주가 동나가는데 시골 슈퍼 셔터가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무알콜 맥주에 손이 간다. 웩. 이게 맥주냐. 찝찌름한 것이 최악이다. 탄산수 섞은 보리차만 못하다. 맥콜에 소주 탄 게 훨 낫겠다. 더욱이 절묘한 것은 마실수록 술이 깬다. 술 깨니 집에 얼른 가고 싶다. 회사 워크숍 개나 줘...
냉동실에서 무알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칙! 따는 소리가 오리지널과 흡사하다. 드디어 첫 모금, 꿀럭 꿀럭 꿀럭. 크! 오호라! 이거 ‘꽤괜(젊은이들이 쓰는 ‘꽤 괜찮다’의 줄임말)’인데?! 오래전 유사 소변 맛 탄산수는 이제 없다. 홉과 맥아의 씁쓰름한 맛과 탄산이 어우러지는 게 나쁘지 않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제법 바디감도 갖추었다. 라거 맥주 특유의 타격감이 꽤 오래 지속된다. 맑고 노란 액체가 혀뿌리를 지날 때쯤에나 이것이 진짜 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 알콜 없어요~. 만족도 90점. 기술의 발달은 참으로 위대하다. 연구원 여러분 애쓰셨어요! 며칠 후엔 초밥을 사 와서 무알콜 맥주와 먹었다. 조화롭기 이를 데 없다. 맛나고 좋은데 취하지 않으니 깔끔하다. 아, 난 취기보다 술이 음식과 어우러지며 내는 풍미를 좋아하는구나. 취하지 않아도 좋구나 야.
그러면서 수집한 무알콜 맥주 단편 지식. 무알콜 맥주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무알콜 맥주와 비알콜 맥주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주세법에서 알콜 함량이 1%가 안 되는 경우 무알콜 음료로 취급한다. 그래서 도수 1도 미만 맥주는 비알코올(Non Alcohol) 맥주로 부른다. 그것과 구분해서 도수 0.00, 즉 알콜이 완전히 없는 맥주는 무알콜 맥주다. 영어로는 알콜 프리(Alcohol Free)다. 국산 맥주 중에 하OO와 클OOO는 무알콜이고 카O는 비알콜이다. 수입 맥주는 대부분 알콜이 소량 포함된 비알콜 맥주가 많다. 포도주가 그렇듯 제품마다 취향을 탄다. 난 하OO으로 정했다.
여름이다. 3년 전 여름만큼이나 위협적인 더위다. 장마는 고개도 못 들고 끝날 요량이다. 폭염, 폭발적인 더위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게 무슨 뜻이냐. 관자놀이가 띵하게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한 계절이라는 거지. 무알콜 맥주로 달리련다. 있어주어서 참으로 고맙도다, 그 이름도 신성하게 형용 모순인 무알콜 맥주여! 그대의 굽어보심으로 내년 건강검진 고사 당당히 동차 합격해 보이리다. 지난 이십여 년 기름때 끼도록 수고한 간이여 그대도 좀 쉬소서. 휴식과 안정을 맛보게 해 드리리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술을 마신다. 내가 무알콜 맥주로 갈아탔다는 얘기를 듣고 약사 친구가 말했다. “그거, 결국 그냥 술로 돌아간다. 쌓아둔 무알콜 맥주 아까워서 거기에다 소주 타 마신다. 그러다 그냥 맥주, 소주까지 연어처럼 거슬러 간다.” 나도 그렇게 될까 궁금하다. 그래. 인간은 술을 마시기 위해 태어난다. 거의 대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