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결벽의 사회 ; 전철 안에서

by Hoon

출근길 전철 안에서였다. 아, 내 이야깃거리 중에는 전철이 무척 자주 등장한다. 전철로 출퇴근하는 아주 보통의 직장인이니 당연한 말씀이다. 생에 남은 날까지 내 글머리에서 “출근길 리무진 안에서였다.” 혹은 “출근길 전용기 안에서였다.” 따위의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시, 출근길 전철 안에서였다. 용케 몇 정류장 지나지 않아서 자리에 앉았다. 하루 출발이 산뜻하다. 모자란 잠을 채울까 핸드폰으로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둘러볼까. 얼마나 지났으려나. 눈으로 보던 것에 집중력이 떨어지니 어디서 뉴스 방송 소리가 들린다. 뭐야 하고 둘러봤다. 소음의 진앙은 맞은편 구석 자리. 머리에 허옇게 황혼이 내린 할머니가 앉아계신다. 이상한 건 분명 귀에 유선 이어폰을 꽂았다는 점이다. 근데 멀리서도 소리가 들린다. 이어폰 소리를 아주 크게 해 두셨나. 왜 그런 경우 있지 않은가.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남다른 패션의 젊은 친구들이 랩 음악 크게 들을 때. 소리가 얼마나 큰지 헤드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경우. 옆 사람도 강제로 음악 감상실로 끌려가는 상황. 그러기엔 소리가 너무 생생하다. 새어 나오는 게 아니라 공개 방송이다.


누군가 제지하겠지. 소리 좀 줄여주시라 얘기하려니 싶었다. 웬걸. 몇 정류장이나 더 지나도 누구 하나 할머니께 말 붙이는 사람이 없다. 막 전철에 오른 탑승객들이 처음엔 이게 뭔 소리인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어렵지 않게 원인을 알아낸다. 그들 중에도 나서는 사람은 없다. 마치 처음부터 들리지 않던 소리처럼 금세 자기 핸드폰 화면으로 빠져 든다. 그것도 아니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 자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귀마개 대신이다. 다들 어쩜 그렇게 인내심이 센 것일까. 할머니의 뉴스 방송은 그 후로도 한동안 어색하고 불편하게 울려 퍼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인문 사회학적 소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나지만 나름대로 사안의 원인을 진단해본다. 대충은 알겠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과의 갈등을 극도로 꺼린다.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어지간해서 나서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미리 알 수 없다. 말로 의사의 교환이 가능할지 돌발적인 폭력을 행사해올지 모르는 일이다. 공연히 나섰다가 나만 피해볼지 모른다. 인내심이 초인적으로 강해서가 아니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애써 참는 거다. 생면부지 타인과 접촉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냥 나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다른 시공간에 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불편이 공간 안의 머릿수대로 곱해져 커진다. 철학자 벤담이 봤더라면 통탄할 상황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불편.


지적도 사람 봐 가면서 하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일도 있었다. 역시나 전철 안. 늦게까지 회식 후 귀가하는 막차.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어른이 불콰해서는 극심한 ‘쩍벌’이다. 한참을 동석하고 가다 인내의 한계가 왔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다리를 살짝만 오므려 주실래요? 제가 멀리 가야 하는데 불편해서요. 했더니 예스나 노가 아니라 창의적인 욕지거리가 돌아온다. 아, 소통 불능이구나. 얼른 몸을 일으켜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지. 반면의 교사로 삼을 간단한 사례가 되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했던가. 강제 뉴스 청취도 이쯤이면 됐다. 할머니가 예측 불가의 행동을 하실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할머니에게 향했다. 저 어르신 듣고 계신 거 소리가 너무 커서요. 실례지만 조금 줄여주실래요? 할머니가 놀란 눈치다. 귀에 이어폰을 빼시며 뭐가 어떻다고요? 하신다. 찬찬히 다시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아이고 이를 어쩐대, 이게 이렇게 돼 있었네! 하며 이어폰 단자를 핸드폰에 고쳐 꽂으신다. 사태의 원인이 정확하게 짚어졌다. 이어폰 단자가 완전히 결속되지 못하고 느슨하게 빠져 있었다. 핸드폰 외부 스피커로 나오는 소리를 할머니는 이어폰의 그것으로 착각하신 거다. 당신은 분명 이어폰을 꽂고 계시니까. 그럴 수 있다. 세월의 풍화를 겪은 어른들의 감각으로는 그런 오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철은 평소의 평화를 겨우 되찾았다. 앗, 그 사이 내 자리에 잽싸게 누가 앉았다. 그것도 평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까지 바라지 않는다. 최대 다수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불편은 없는 세상이길 바란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무관심과 외면이 최선과 만능의 묘책일 수 없다. 결정적 순간에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어떻게? 기술적으로. 여기서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다.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신사적으로. 당신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변화를 일으켜 모두의 안녕을 추구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 지금 살짝 불편한 대화를 시작할 참이라고. 단, 사람 봐가면서. 언어가 왜 인간과 금수를 구별 짓는 매개인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상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건전한 갈등은 대단히 필요하다. 그건 실은 갈등이 아니라 조율이다.


이걸 또 잘못 이해하시고 공연히 총대 멨다가 얻어터지는 분들이 없으시리라 믿는다. 세상이 좀 험해야 말이지. 내가 바라는 건 단지 배려 있는 세상이다. 나의 부주의함이 당신의 불편이 되지 않는 것. 또 모두의 불편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무관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 오늘은 또 전철 안 작은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웬만하면 내가 출동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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