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담임선생님께 올리는 간절한 부탁 말씀

by Hoon

내일 오후 세 시 삼십 분. 딸아이 학교 담임선생님을 뵙기로 했다. 귀한 분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다. 자식의 스승 앞에 조아린 부모는 영원한 을(乙)이다. 감히 갑(甲)의 시간을 허투루 빼앗을 수 없다. 철저하게 대비하는 게 도리다. 짧은 시간 조리 있게, 또 정중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이렇게 예행연습까지 해본다. 아래는 내일 숙지해야 할 내 대본이다.



선생님, 수업 마치고 피곤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우선 저희 아이 잘 지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과드릴 것도 있습니다. 저희 애가 2학기 반장으로서 선생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체험학습 신청하면서 수업을 자주 빼먹었죠. 반장이 솔선수범하지 못하다 평가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다 엄마 아빠 잘못입니다. 중학교 가면 못 누릴 테니까, 또 할아버지 할머니도 연로하셔서 더 늦기 전에 가족끼리 여가 활동하려고 욕심을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께 부탁 올리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말씀드리기까지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학교생활에 문제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더라고요. 실은 아이가 선생님에게 무슨 말씀 드릴 거냐고 해서 검사 다 받고 왔습니다.


아, 그리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이가 선생님이 어떻대 엄마 아빠한테 고자질한 거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에 대화하면서 저절로 알게 됐습니다. 저희 집 문화가 그렇거든요. 식구끼리 하루 일과를 자연스럽게 공유합니다. 저와 아내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각자 회사 얘기 많이 합니다. 아이가 그걸 보고 배운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게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 아이뿐 아니라 부반장 아이들 부모님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것 같고요. 아이랑 대화하면서 듣고, 제가 재택근무 때문에 출근하지 않는 날 어깨너머로 알게 된 몇 번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쌓았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선생님께 직접 부탁 말씀을 올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1학기 반장이랑 비교가 돼서 자꾸 주눅이 든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답니다. 그 점은 분명히 하더라고요. 1학기 반장한테는 “반장아 부탁해.” 하셨는데, 자기한테는 몇 번이고 “잘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물으신대요. 아, 선생님이 날 못 믿는구나 싶답니다.


그 계기가 됐을 법한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그날 재택근무여서 직접 보고 들은 겁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 수업에서 학급 활동으로 ‘마피아 게임’ 했었죠. 진행이 잘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 얘기도 그렇고 제가 생각해도 화상 수업으로 하기는 어려운 종목인 것 같더라고요. 아이가 도무지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께 다른 게임 하면 안 되냐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이 반장이 못 해서 그러는 거다, 하시더군요. 물론 실제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힌트라고 주셨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도 못 하는 걸 왜 우리한테 시키나 싶을 수도 있잖아요. 회사에서도 그렇습니다. 팀장이 팀원한테 일 시킬 때 자기도 해답을 모르면서 해결해 오라고 업무 지시하지는 않거든요. 더욱이 아이들은 회사 팀원이나 부하도 아니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렇게 부득이 선생님 찾아뵙게 만든 결정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집에 왔는데 풀이 잔뜩 죽었더라고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곧 있을 ‘전교 학급회장 회의’에 대해 물으셨답니다. 아이가 들은 거 없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책임감도 없이 반장한 거냐?” 하셨대요. 그래서 아이가 따로 공지가 없어서 몰랐다고 하니까 “전에 반장 해봤으면 알 거 아니냐?” 재차 물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반장 잘하는 아이가 어디 있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반장으로 태어나는 아이가 정해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반장 해봤던 아이만 반장해야 되는 건가. 반장 처음 해보는 아이도 차근차근 익혀서 능숙해지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한 명의 완숙한 리더로 성장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선생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간절하게 부탁 말씀 올립니다. 선생님 성에 안 차시겠지만 잘 이끌어 주십시오. 선생님이 어떻게 지도하시냐에 따라 아이 인생이 결정됩니다. 아이가 영영 무리 앞에 나서기를 꺼리게 될 수도 있고, 내가 서툴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구나, 나도 리더로서 잘할 수 있구나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아나요. 아이가 나중에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여성 리더가 될지.


아이가 5학년 올라와서 선생님 뵙고 너무 좋아했던 거 기억합니다. 우리 선생님 수업도 너무 재밌게 하시고 아이들이랑 얘기도 많이 하신다고 좋아하더라고요. 저도 온라인 수업 언뜻 봤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요새 그냥 직업인으로서 벌이 하는데 만족하는 선생님도 더러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소명을 가지고 수고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이런 말씀 안 들어주실 분 같았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5학년도 이제 학교 가는 날만 따지면 겨우 두어 달 남은 건데 관둘까도 싶었고요. 근데 어쩌면 아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점일 수도 있어서 부득이 찾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 잘 지도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 올립니다. 아이가 혹시 예의에 어긋나거나 품행이 바르지 못하면 집에서 제가 따끔하게 가르치겠습니다.


긴 말씀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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