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맞는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기피했던 건 아니다. 2차도 1차 때 주사 맞았던 동네 소아과 병원으로 갔다. 언제나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로 붐비는 곳이다. 예약 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병원 안에 빈자리가 없다. 일반 진료환자, 그러니까 환절기 고뿔에 걸린 어린이 환자와 나 같은 백신 접종 예약자가 한 데 섞였다. 문 밖에 이미 의자를 놔두었다. 아이들 앉기 좋게 앙증맞은 크기다. 거기 얌전히 앉아서 호명을 기다린다.
예상한 대로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병원 초심자라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난 12년 경력자다. 삼사십 분은 너끈히 기다려야 한다. 원장님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온 정성을 다해 진료하신다. 자연스레 진료시간이 길어진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아는 나는 잠자코 더 기다리기로 한다.
그때 나 다음으로 온 젊은 커플 중 남자가 분연히 일어났다. 접수대로 가서 간호사 선생님을 부른다. 남자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귀를 쫑긋 세워 듣는다. 오전 10시로 예약하고 왔는데 벌써 삼십 분도 넘게 지났다, 다른 환자들이랑 따로 대기 명단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저분들은 오늘 와서 기다리는 거고 나는 한참 전에 예약한 건데 같이 기다리는 게 맞느냐, 따져 묻는다.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병원 접수 시스템이 안 받쳐준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고맙겠다, 말씀하시면서 고개를 조아린다.
다행히 더 큰 소란은 없었다. 남자도 딱히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자리로 돌아간다. 남자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원칙대로라면 예약 환자와 당일 접수 환자 대기 줄은 따로 취급하는 게 맞다. 일반 환자를 진료하다가도 예약 환자 시간이 되면 중간에 ‘치고 들어가는’ 게 가능해야 한다. 한데 그게 또 어디 말처럼 쉬운가. 원장님 한 분에 간호사 선생님 달랑 두 분 있는 작은 병원에 그런 첨단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무리한 요구다. 예약자와 일반 환자 대기 명단 따로 관리하는 게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아니면 자동차 도로에서 차선 합칠 때처럼 백신 접종 한 명, 감기 환자 한 명 교대로? 그것도 금방 순서가 꼬일 거다.
애초에 커플 남자가 오전 10시에 예약하고 왔다고 해서 딱 그 시간에 주사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접종 예약 시스템은 대학병원처럼 분단위로 예약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치면 나도 10시 예약인데 그럼 당신네 커플이랑 나랑 진료실에 동시 입장해야 되나?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분단위로 예약하는 큰 병원도 마찬가지다. 내가 먼저 도착했어도 예약 시간이 나보다 빠른, 나중에 온 다른 환자가 먼저 진료실에 들어간다. 사실 그렇게 촘촘한 예약도 유명무실하다. 환자마다 진료에 소요되는 시간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이다. 이러나저러나 병원은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예약 시간에 정확하게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는 건 판타지다. 병원은 그런 곳이다. 우리 동네 소아과 병원도 다르지 않다. 나는 십분 이해한다. 어이, 젊은이 신사답게 행동해. 남자를 쓱 한 번 쳐다본다.
그러다 오지랖을 무릅쓴다. 접수대 간호사 선생님 앞에 섰다. 선생님을 작은 소리로 부른다.
-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좀 전에 저쪽 남자분 얘기 들었거든요. 저분 얘기도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하더라고요. 그럼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백신 접종 예약자 오면 원장님 혼자 일반 환자랑 같이 진료 보신다, 사정 상 대기 명단을 따로 두는 게 어렵다, 정시에 예약하고 오셨어도 이삼십 분 더 기다리셔야 한다, 죄송하다, 이렇게 미리 귀띔만 해줘도 기다리는 사람들 반응이 조금 낫지 않을까요?
간호사 선생님이 수긍하신다. 몰랐던 건 아닌데 바빠서 실행하지 못했다는 눈치다. 두 분 간호사 선생님 눈코 뜰 새 없는 형편도 모르지 않다. 아픈 아이들, 그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계속 몰려오시지, 진료실 안에서 주사 맞는 아기 목청 터져라 울지, 대기실에 아이들 뛰어다니지, 의자에 걔들이 꺼내 놓은 동화책 어지럽지, 전쟁터가 따로 없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린다. 진료실에 들어가며 원장님께 인사드린다. 원장님이 먼저 알은체 하신다. 지난 1차 때는 어땠느냐, 알레르기 반응 같은 건 없었느냐 묻는다. 지난번에 괜찮았으면 오늘도 별일 없을 거다, 그렇더라도 바로 가지 말고 밖에서 15분 기다렸다가 가시라 이르신다. 왼팔 소매를 걷어 올린다. 바늘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접종이 끝났다. 세상에 이렇게나 아프지 않게 놔주는 주사에도 동네 꼬마들은 자지러진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나온다.
대기실 의자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벽시계가 얼추 갈 시간에 가깝다. 접수대로 가서 간호사 선생님께 말을 붙인다. 선생님, 저 원장님이 기다렸다가 가라고 한 시간 다 되어서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옆에 다른 간호사 선생님이 얼른 답한다. Hoon님은 아직 1분 30초 남으셨어요, 더 앉았다가 가세요, 시간 되면 말씀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상관에게 보고하는 군인처럼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그 시간은 언제 또 기록해놨대. 철두철미하다. 원장님이 따로 지시한 것도 아니다. 주연과 조연의 오랜 케미스트리다.
딸아이 갓난아기 때 뉘었던 유아용 자동 측정기
1분 30초를 채우기 위해 다시 의자에 앉는다. 옆에 우리 애 갓난아기 때 키 몸무게 재던 ‘유아용 측정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야, 이거 아직도 있었네. 아이 여기 처음 눕혀서 쟀을 때 칠팔십 센티도 안 됐었는데. 뜻밖에 추억 어린 물건을 찾은 기분이다. 오래됐어도 깨끗하다. 관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딱 여기 병원 같다. 최첨단 의료 장비 갖췄다고 좋은 병원이 아닌 거다. 진정으로 아픈 이들을 위하는 마음씨 좋고 늘 한결같은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계신 병원. 거기가 진짜 좋은 병원이다. 천직,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 있다면 원장님과 두 분 간호사 선생님들 아닐까. 같이 직업을 갖고 벌이 하는 사람으로서 몹시 부럽다. 아무리 정신 못 차리게 바쁜 틈에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아니지, 그건 단순히 프로의식이 아니다. 말하자면 고귀한 인간애다.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Hoon님 시간 됐네요, 어디 주사 맞은 자리 한 번 볼까요. 왼쪽 어깨를 드러내 보여드린다. 괜찮단다. 집에 가서 다른 증상 없는지 잘 살펴보고 오늘내일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원장님,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크게 인사하고 병원 문을 나선다. 세 분이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겠다. 희한하게 자주 오고 싶어 진다. 그러면 안 되는데. 와서 대기 명단에 이름 올리는 순간부터 낫는 것 같은 병원이다. 우리 동네 소아과 클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