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데
가난함과 부유함을 구분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12시에 마치는 학교생활은 짧았다. 어김없이 하교를 하면 친구 집으로 향했다.
가난한 집
처음 놀러 간 친구네 집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당시 나는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덕분에 부유하게 자랐다.
그런데 처음 놀러 간 친구네 집은 주택에 있는 단칸방이었다.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친구와 어울려서 놀았다. 친구와 내가 방에서 노는 것을 친구 부모님과 누나가 코 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어머니는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상에 밥을 차려 왔다. 김치, 콩나물, 김, 콩자반 그리고 된장찌개. 내가 좋아하는 계란이나 소시지는 없었다.
친구네 네 식구와 나까지 다섯 명이 앉기에 좁았다. 친구 어머니는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뒤에서 기다리셨다.
나에게 많이 먹으라고 밥을 더 주셨다. 눈치 없는 나는 친구 집에서 먹는 밥이 맛있었는지 밥 두 공기를 먹었다.
친구 어머니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밥 대신 고구마를 드셨다. 철이 들고서야 그때를 떠올리니 친구 어머니가 드실 밥까지 내가 먹어버려서 식사를 고구마로 때우신 것 같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닌다고 혼을 내셨다. 게다가 그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계시 던 터라 그 친구 집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고 더 꾸중을 들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퇴근 후 그 친구 집에 간식을 사들고 가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어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부잣집
며칠 후 같은 반 여자아이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지금이야 레스토랑이나 햄버거 가게에서 생일파티를 하지만, 당시에는 집에 음식을 준비하고 초대하는 생일파티가 유행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생일인 친구 집에 도착했다.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3층 주택. 내가 사는 아파트도 아니고, 기존에 알던 주택이 아니었다.
잔디밭과 차고를 지나서 한참을 들어가자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멋진 문이 나타났다. 집에 들어서자 통유리로 정원이 보이는 큰 거실이 인상적이었다.
친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잠자는 방, 노는 방, 공부하는 방 친구의 방만 3개였다. 방 속에 복도가 나타나고 화장실이 나오고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생일파티를 하는 방으로 모였다. 보통은 생일잔치면 케이크, 김밥, 치킨 정도인데, 외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특별한 음식들이 한상을 가득 채웠다.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피자, 파스타, 스테이크 같은 종류가 아니었을까?
그날 밤 집에 와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부잣집 아이가 부러웠고, 가난한 집 아이가 불쌍했다.
심각하게 충격을 받았으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 친구들과 장난치며 학교를 다녔다. 다만 친구 집에 가지 않고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놀았다. 어머니는 아마 선생님 아들이 남에 집에서 밥 얻어먹고 다닌다는 말이 듣기 싫었던 것 같다.
3학년 때 전학을 가는 바람에 그 친구들의 소식이 끊겼지만, 빈부격차를 나에게 처음 체감하게 했던 그 친구들이 잊히지 않는다.
현재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의 빈부 여부를 빠르게 판단하고, 깊이 체감한다. 봉사활동을 가서 더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대학시절 타워팰리스에 사는 친구 집에 가보기도 했다.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너무 다르게 살아간다. 서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인양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적응해간다. 전혀 다른 세상 사람처럼..
* 영화 기생충을 봤습니다. 거기서 반지하 고시원에 살던 저를 만났습니다. 자식 방에 방문하셨던 어머니는 좁고, 곰팡이 가득한 곳에서 살던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원룸을 구해주셨습니다. 그곳 생활에 익숙해져서 정작 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