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문이 열렸다. 빈자리가 어딨나? 순간 배경이 흑백으로 변하고, 한 자리만 컬러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영화에서나 나오던 그런 느낌.
핑크색 임산부석이다.
수도권 지하철은 임산부석을 핑크색 스티커로 눈에 띄게 잘 표시해놓았다.
문득 SNS에 임산부인 친구가 임산부석에 앉지 못하고, 애태우던 글이 떠올랐다. 내 오늘 시민의식 한번 발휘 해보리라!
그렇게 임산부석 앞에 우뚝 섰다. 홍대입구에서 잠실까지 약 30분 이곳을 사수하겠다. 정차할 때마다 후다닥 뛰어와서 앉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래를 굽어보며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여기 임산부 지정석입니다. 막 앉으시면 안 돼요!
젊은 사람들은 앉지 않았고, 50대 전후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앉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일어섰다. 왕십리를 지날 때쯤이었다. 아주머니 한 명이 그 자리에 앉았다. 강적 출현이다. 나의 우렁찬 목소리에도 아주머니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나도 알아. 다리가 아파서 그래. 젊은 사람들도 안 지키던데 뭘"
"요즘 젊은 사람들 잘 지킵니다. 어르신이 모범을 보여주세요."
"신경 쓰지 마"
"옆에 앉으세요. 여기 임산부석입니다. 따님이나 가족 분이 임산부라고 생각해보세요"
"왜 나한테만 그래?"
"앉으려는 분들한테 다 말씀드렸어요. 다들 비켜주시던데요."
"아~몰라"
"어르신이 부끄러운 줄 아셔야죠"
전철 안의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나는 떳떳했다. 언성이 높아지고 주목받을수록 아주머니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다 결국 아주머니는 옆에 빈자리로 옮겨 앉았다.
거기 앉으면 안 된대. 나도 아까 저 앞에 총각한테 혼났어
지하철이 정차할 때마다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곧이 곧대로 지켜냈다. 나중에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도와서 임산부석에 앉는 것을 말려주었다. 멀리까지 와서 핏대 세우고 힘 뺀 보람이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임산부석을 인식하고 잘 지켰다. 어린 학생들과, 20~30대 젊은 사람들은 한 번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분들도 그 자리를 범하지 않았다. 50대 전후로 보이는 아줌마들이 다섯 명이나 앉았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깐, 임산부가 자리를 요청해도 비켜주지 않고 큰소리 칠 사람들이다.
임산부 오면 비켜주면 되잖아.
눈 부릅뜨고 비켜달라는 남자 앞에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악쓰며 버티는 사람들이 퍽이나..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모르고 앉았는지, 알면서 앉았는지..
알면서 앉는 사람들은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면 또 앉겠지만, 또 무안을 당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거나 고민을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걸로 충분하다.
모르고 앉은 사람들과 소란스러움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임산부석에 대한 인식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되어도 임산부석은 조금 더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겠지. 단 한 명이라도 인식이 생겼다면 30분 간의 나의 괴짜 짓(?)도 아주 쓸데없는 일은 아닐 테니깐..
'남들도 안 지키는데 왜 나만 지켜야 하냐?'는 사람이 가장 나쁘고 무섭다. '나부터 지키고 주변에 지키는 사람을 늘이자'는 마음을 가진다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지하철에서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의도가 어떻든 승객들에게 불편함을 끼쳤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