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데 특별하지 않은 날
저녁 8시. 회사 앞 오래된 매점에 들어섰다.
"어~오랜만이네요"
낯익은 주인 부부가 반갑게 인사한다.
"저.. 식사되나요?"
"밥 끝났는데.."
"그럼 라면이라도 될까요?"
"원래 안되는데.. 해줘야지."
부엌 사이로 보이는 가스 불위로 찌그러진 양은냄비가 올라간다. 하루 일과를 마치려던 부부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3,000원짜리 라면 한 그릇 팔아서 남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이 든 부부가 정이 많거니와 종종 아침식사를 하던 사람이라 거절을 못했으리라.
회사일도 많고, 개인적인 일도 있어서 퇴근이 늦다. 옆 부서 사람들이 같이 식사 하자할 때 그냥 먹을걸.. 이 시간이면 주변에 식당들은 문을 닫는다. 변변한 밥을 먹으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사실 이 시간까지 내 사무실에 남아있었던 적은 몇 번 없다. 야근을 해도 지사에서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야근은 드물다.
그래도 야근과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하다. 직장생활(군생활 포함) 11년 차. 모든 게 무덤덤하다. 딱히 일이 하기 싫거나 어렵지 않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는 그려진다. 다만 생각대로 행동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다.
야근하고 일하는 시간을 늘이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 요구되는 역할이 있다. 반대로 회사에서 가정의 일을 하면 가정에서 여유가 생긴다. 회사일은 지장이 생기겠지.
그래서 스스로 경계선을 뚜렷하게 긋는다. 직장, 가정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단절이 필수다. 다만 두 가지 다 충실하려다 보니 개인에게 가장 소홀해져 버린다.
몇 년간 친구를 만난 횟수가 한 손에 꼽힌다. 게다가 좋아하던 운동이나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조차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맞는가 하는 고민에 잠기는 순간.
"맛있게 들어요"
라면이 나왔다. 김이 나는 라면에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넣어서 휘젓고 싶다.
"후~"
살살 저어서 한 젓가락 집어 올린다. 세게 불어서 조심스레 빨아들인다.
"어후~맵다."
건더기를 보니 매운 라면인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 매웠나?
고춧가루도 안 보이는데..
아! 너희들 때문이구나. 땡추 몇 조각이 면발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요놈"
한 놈씩 건져낸다. 이미 국물에 특기를 마음껏 발휘한 후라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건져냈다.
"후루룩, 후룩"
다 먹고 나면 배가 아플 것 같다. 매운 것을 못먹으니깐, 아니 먹을 수는 있다. 먹고 나서 배가 아파서 그렇지.
"에이~몰라"
몇 젓가락 후룩거리고 국물까지 다 마셔버렸다.
저녁으로 라면을 먹은 것을 알면 아내는 분명 걱정을 할 테지만 괜찮다.
한 그릇 먹고 다시 일을 한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렸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오늘 아내가 돌아온다. 5일간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에 마중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보고 싶었지만, 딸과 함께 지낸 5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조금 있다가 돌아오는 아내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오늘 결혼 4주년째 되는 날이다. 아주 특별한 날인데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지내도 괜찮은 걸까?
※ 그동안 회사 일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글을 쓸 시간이 있었지만 내키지 않았어요.
나름 전사 교육 간 발표에서 1등도 했고, 응원해주시던 승진자격시험도 합격했습니다. 잠깐 기분이 좋았지만, 이내 계속해서 다운되고 어디론가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저는 점점 더 기운이 빠집니다. 연초 대비해서 인정받고 성과를 거두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하네요. 자극과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