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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굴기와 구르기





나의 의문과 웃음이 고미숙 선생님에게 닿아 있어서 기쁘다. 고미숙 선생님의 책은 이 책이 다섯 번째다. 


글쓰기 책이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서는’ 존재이고, ‘사이’의 존재이다(27쪽). 인간은 생각을 ‘생각’하는 존재이고(31쪽), 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힘을 멈출 수 있는 존재이다. 앎은 세계를 향해 무한히 뻗어 나가는 것이며, 또한 내부를 향해 깊이 침잠하는 것이기에,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다름 아닌 무지다(40쪽). 생명을 보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하며, 그 속도와 리듬에 대한 앎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실천은 간단하다. “간절히 궁금해하는 것” (운성스님, 명상-유튜브) 무엇에 대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텅 비운 채, 우주적 가능성으로!” 모든 배움의 기초가 질문인 것도 그 때문이다. (41쪽) 



궁금해할 것이 두 가지다. 세계의 근원과 존재의 심연. 내가 궁금한 두 가지와 맞닿아있다. 빅뱅과 인간의 의식.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려 애썼지만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의 개념을 제시한 카를로 로벨리는『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저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을 통해 발전된 세계관이 분명하고 정확한 의미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여러 해석을 가질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들 역시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81쪽)   



인류는 우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정도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미시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불연속성이 발견되고, 모든 움직임에 우연한 요소인 본질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결국 어떤 입자의 움직임은 ‘입자의 존재에 대한 확률의 변화’가 된다. 그리고 그 입자가 어느 방향으로, 왜 움직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우리는 알 수 없다. 


빅뱅이 일어난 이후의 세계에 대해, 우주에 대해, 지구에 대해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빅뱅 이전에는, 빅뱅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데 동의한다. ‘특이점’이라 부르는 이 상황에서는 물리학 법칙들이 무너진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과학자들도 대폭발이 일어나던 그 첫 순간, 즉 처음 10초 동안 일어난 일을 해석하지 못한다(10초는 1초의 100만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분의 1초다.) (『신의 언어』, 71쪽) 



인간은 육체 속에 산다. 진화론에서는 진화의 과정에 ‘영혼’이 출현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뇌, 어느 곳에서도 마음이 발견되지 않았듯, 영혼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혼은 없는 걸까. 인간, 알고리즘으로서의 유기체인 인간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분해되어 없어지는 걸까. 내 몸을 이뤘던 원자는 영원히 존재할 테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우주에 다시 없는 독특한 결합으로서의 ‘나’는, 나의 죽음 이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면, 무사히 벗어난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 내세관 속에서 자랐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고, 그리고 구원과 파멸이 있다고 배웠다. 그렇게 믿는다. 다른 답을 찾는 이유는 내가 가진 해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다. 다른 해답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이전 세계에서는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했다. 유전과 환경 중, 유전의 대부분과 환경의 상당 부분이 부모에 기인했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존재인 부모가 계급을 결정했고 삶을 결정했고 인생을 결정했다. 우리는 아무도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부모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영상으로 보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비극이 언제쯤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뉴욕의 사망자 집단 매장과 인도의 갠지스강 시신 유기 등은 이 세계의 종말 같은 모습이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 사는지가 중요해진 걸까. 어제도,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죽는다. 전염병, 암, 성인병, 각종 질병으로 죽는다. 사건, 사고 때문에 죽는다. 노화로 인해 죽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부자들만 ‘불멸’을 원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죽음은 쉽지 않다. 죽음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미래다. 부자들만 ‘불멸’에 가까운 제2의 삶을 살아갈 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뿐이다.  




어제는 도서관에 갔다. 희망 도서로 신청한 책을 가져가라 하기에 받으러 갔는데, 멀리 이 책의 표지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어, 그거 제 책 아닌데요,라고 말할 뻔했다. 아니었다. 내가 신청한 책이 맞았다. 




나는 잘 웃는 사람이고 쉽게 웃는 사람이다. 요 며칠 웃을 일이 없었는데, 책을 살짝 넘겨보다가 마스크 너머로 ‘푸핫!’ 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뒹굴기와 달리기. 이 책의 부제는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로서 인간 행동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되, 그 연구의 시작이 단세포 미생물, 박테리아의 조상들이다. 많은 박테리아는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임의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고 한다. 유익한 물질을 만났을 때는 달리기 운동을 통해 가까이 간다. 해로운 물질을 만났을 때는 뒹굴기 운동을 통해 도망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박테리아가, 생존을 위해, 오직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뒹굴기 운동과 달리기 운동을 한다는 건데, 사진을 보는 순간 너무 웃겼다. 뒹굴기와 달리기라니. 하하하. 뒹굴기와 달리기라니. 유익한 사람에게는 달려가고 해로운 사람에게서는 도망쳐라. 뒹굴어서 도망쳐라. 도서관 2층 계단 앞에 서서 한 번 더 웃었다. 







뒹굴기와 달리기를 너머, 유성 생식과 우리의 친구 척추동물을 지나, 행동적 유연성의 진화와 수다 떨기의 힘, 뇌에서의 고차 인식과 기억 그리고 마음과 감정에 대해 읽어보겠다. 이 책 어디에서도 영혼을 찾을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내게는 뒹굴기와 달리기가 있으니. 뒹굴기와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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