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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권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1쪽)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태아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노예는 일생 동안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평생을 태아 상태에 머문다.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노예는 실종자이고,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며, 얼굴이 없기에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 마지막으로 노예는 법적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법률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상호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인 사회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를 가진다(58쪽). 이에 대한 설명 중에 저자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했던 성리학적 세계관을 예로 든다. 여성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 실존을 인정받지 못한 채로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이미 막을 내렸고, 가부장주의는 이제 태곳적 이야기라 치부되지만, 정말 그런가. 여성은 이 사회의 성원인가. 여성은 성원권을 소유하고 있는가. 




여성은 농노 계급만큼 구조화된 계급이라는 모니크의 주장(『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100쪽)을 남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걸 이해한다. 나도 그랬다. 나만 그런가.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의 강남순 교수님도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동안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라고 차별받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위 문단의 ‘노예’를 ‘여성’으로 고쳐보자. 


노예(여성)는 실종자이고,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며, (여성은) 얼굴이 없기에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 마지막으로 노예(여성)는 법적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법률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출가외인(시집간 딸은 자기 집 사람이 아니고 남이다)이라, 결혼 후에는 친정에서 권리가 없다. 여성은 친정에서 없어진 사람이며 잃어버린 사람, 실종자이다. 얼굴이 없기에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의 시간 동안, 그리고 그렇게 체득한 경험이 반복되는 동안 여성은 얼굴 없는 사람이다. 체면이 없고 명예가 없다. 여성은 재산의 소유를 포함해 모든 법적 절차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미국의 기혼 여성들에게는 재산을 소유할 권리도, 계약할 권리도 없었다. 직장을 가진 기혼 여성의 임금은 법적으로 모두 남편 소유였다. (http://www.nytimes.com/2001/08/09/business/09SCEN.html)



지금이 그런 세상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이 동영상을 추천하고 싶다. 방송 트렌드의 변화로 인해 실직자가 된 개그우먼들의 고민과 절망을 잔잔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새로운 예능 트렌드 송은이, 갈 곳 없는 개그우먼) 



그럴 수도 있겠다. 남자 개그맨의 수가 많으니까, 남자들이 더 잘하니까, 남자들이 더 웃기니까, 방송국에서 남자들을 찾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그럴 수는 없다. 모든 분야에서 남자가 더 잘할 수는 없다. 잘하는 사람이 모두 다 남자일 수는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과학, 수학, 건축, 조각, 회화, 작곡 심지어 요리마저도. 모두 다 남자들이 잘할 수는 없다.  




‘유리 에스컬레이터’ 현상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알려진 분야에 남성이 진출했을 때 수적으로는 남성이 소수이지만, 결국 지도자적 위치에 자리 잡는 쪽은 다수가 남성임을 나타낸다. ‘유리 에스컬레이터’ 현상은 여성의 ‘경력단절’을 촉진하며, 여성이 이루어온 ‘업적’을 경시하는 풍토를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한다. 여성이 다수인 분야에 남성이 등장할 때, 비록 소수라 해도 사람들은 ‘남성-지도자, 여성-구성원’이라는 젠더에 관한 고정관념을 작동시킨다. 결론적으로 남성이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99쪽)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다르다, 고 쉽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여기에 있다. 여성들은 매 순간 ‘유리 천장’을 실감하고, ‘유리 에스컬레이터’로 절망한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더 이상 도전하지 않게 되며, 문화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요구에 점차 순응한다. 이는 농경문화가 시작된 역사적 시점부터 여성이 구조화된 계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여성에게는 성원권이 없다. 여성은 보이지 않는 채로 살아가야만 하고,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여성들은 김여사, 된장녀, 개똥녀로 비난받으며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된다.(76쪽) 여성은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아야 하며, 보이지 않는 여성이야말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좋은 여성’이 된다.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수의 정치가, 더 많은 수의 법률가, 더 많은 수의 CEO, 더 많은 수의 의사, 더 많은 수의 기자, 더 많은 수의 방송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외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청와대 대변인, 정당 대표, 시장, 도지사, 사장, 교장선생님, 기타 모든 협의회의 회장 등 리더의 위치에 더 많은 수의 여성이 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여성이 보이는 곳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전망은 다르다. 



나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여성과 성공하지 못한 여성의 차이는 성공한 흑인과 성공하지 못한 흑인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여성이며, 흑인인 것이다. 성폭행당하는 여성의 수가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습격당하는 흑인의 수보다 더 많다는 점에서, 여성은 흑인보다 못한 처지라고 할 수도 있다. …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 –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 – 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294쪽) 



여성은 이등 시민이다. 스토커,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미성년자 강간, 화장실 몰래카메라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폭력을 비롯한 기타 다른 범죄에 비해 훨씬 더 가볍게 처벌되고 있지 않는가. 부부강간과 아내 폭력의 희생자들은 국가와 사회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가. 대로를 걷고 있는 여성에 대한 공격이 ‘무차별적 폭행’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은 이등 시민이다. 여성은 사회 속에서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감상은 페미니즘 관점에 집중됐지만, 전체적으로는 사회와 사람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책이다. 이런 훌륭한 책을 한국 사람이, 한국 여성이 저술했다는 데에 무한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번역자의 도움 없이 그의 모국어로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저자 소개 중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라는 설명이 무슨 말인지, 읽으면 바로 이해된다. 차분하고 날카로우며, 자세한 설명이 이어져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런 저자를 알게 되어 기쁘다. 그의 또 다른 책을 만나고 싶고, 그의 새로운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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