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매일, 매일 밤, 매시간, ‘내가 제대로 하는 걸까? 충분히 하는 걸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는 어머니로서의 죄책감이 안겨주는 완전한 무게와 부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성제도 아래서 모든 어머니는 어느 정도는 아이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172쪽) 



“**야!”

언니는 나를 작은아이 이름으로 불렀다. 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부르듯 그렇게 나를 불렀다. 언니에게는 중학생과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가 있었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늦둥이가 있었다. 늦둥이가 작은아이와 같은 나이였다. 나는 언니의 막냇동생보다도 어렸다. 


“**야, 내가 보니까 그래. 나는 자식한테 내 힘을 다 쏟았거든, 전부 다. 근데 자식한테 힘을 100% 다 쏟으면 안 되는 거더라. 남겨 둬야 되더라고, 그게.”  

“언니, 저는 자식한테 힘을 100% 다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언니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네가,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니. 놀란 두 눈이 묻는다.  



난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식에게 내 힘의 100%를 쏟으면 안 된다는 걸, 난 어떻게 알아챘을까. 한국적 어머니상의 완벽한 현신인 우리 엄마의 딸로 살았으면서. 마흔이 넘는 나이에,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시어머니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며느리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아들(남편)은, 하늘 같은 아들이다.” 시어머니가 말한 그대로였다. 큰아들은 하늘만큼 귀한 아들이었고, 하늘처럼 의지하는 아들이었다. 두 분에게는 자신들의 생존보다 자식의 안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 자신의 그 무엇보다 자식의 그 어떤 것이 훨씬 더 소중했다. 자식의 일이라면 무조건 더 가치 있고, 더 절대적인 무엇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았던 내가, 그런 사랑을 지켜봤던 내가, 어떻게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사랑이 너무 극진해서는 아닐까. 나는, 우리 엄마가 내게 해 주신대로 내 딸에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 부족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그 간극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모성이 부족한 엄마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무슨 일에든 내 힘의 100% 를 쏟는 사람은 아니니까. 더 사랑하지 않음을 말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모성이 부족한 엄마라고 말하는데도 어떻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었을까.    



큰아이는 4개월간 모유수유를 했다. 3개월 출산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가니 8월 말이었다. 며칠 출근을 했더니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젖이 말라버렸다. 작은아이는 내가 집에 같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완모를 하기로 했다. 이제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중요한 순간, 젖이 조금 모자라 아이가 앙앙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젖이 나오지 않는 빈 가슴에 아이를 품어 살살 달래고 있으면, 남편이 우유나 두유를 따뜻하게 데워 사발에 담아왔다. 내 몸은 깔때기가 아닌데. 철없는 부부들은 우유를 마시면 바로 젖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걸까. 다행히 아이는 금방 잠들고 땀으로 범벅이 된 철없는 부부는 겨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때는 힘들지 않았다. 아이가 있어서, 아이가 날 찾아서 오히려 괜찮았다. 


괜찮지 않을 때는 오히려 요즘이다. 아이들이 ‘엄마, 사고 싶은 거 사세요’라며 용돈을 아껴 현금 봉투를 내밀 때. 구청에서 마련했다는 ‘경단녀 취업 프로그램’ 플랜카드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내가 제일 명랑했을 때, 내가 제일 건강했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환경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난 운이 좋았다. 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개인이니까, 나는 내 결정이 옳았다고, 내 선택이 옳았다고 말한다. 과거를 부정하는 인간의 자아는 분열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과거의 나를, 나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내 선택은 옳았다. 나는 원하는 걸 얻었고,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을 100% 내주는 엄마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고, 모성이 부족한 엄마라는 걸, 부끄럼 없이 말한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전 12화 성원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