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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성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폴 로진의 말을 인용해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은 동물이거나 동물적 물질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혐오의 대상은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동물성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41쪽) 



인간은 동물인 것이 분명한데,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대상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너의 구별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은 나와 너 사이의 차이를 바탕으로 우리와 다른 ‘그들’을 창조해냈다. 어떤 인간이 더 인간다운가. 어떤 인간이 더 동물에 가까운가. 이 질문이 바로 혐오의 시작점이다. 


유대인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동물성과 육체성이 두드러진 존재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더 냄새나고 더 성적이라고 인식되었으며(160쪽), 유대인 남성은 다른 어떤 인종의 남성보다 더 ‘여성적’이라고 여겨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들은 난폭한 짐승과 같다고 생각했고(161쪽),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존재로 여겨졌다.     


착하고 거짓이 없고 주인에 대해 무한한 충직함을 보이는 반려동물들을 떠올려볼 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판단은 진실이 아니다.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동물’이다.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동물이기를 거부하고, ‘동물성’이라는 굴레를 자신들과 다른 집단인 ‘그들’에게 투사한다. 유대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민자, 성적 소수자 그리고 가장 방대한 소수 집단인 여성에게.  



특정 집단을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라고,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나고 성적이며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집단이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그런 집단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지배하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닌 그들이 동물이고 더럽고 냄새가 나는 대신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발밑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다. 이와 같은 모순적 사고가 골치 아픈 동물성과 자신과의 거리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다. (147쪽) 



인간을 동물과 식물에 비유할 때, 남성은 동물로 여성은 식물로 환원된다. 남성은 동물의 활동성과 적극성을, 여성은 식물의 고정성과 수동성을 부여받는다. 반면 인간과 동물로 그 기준점이 이동하면, 남성은 더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 여성은 더 동물적인 존재가 된다.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동물적인가. 여성을 더 동물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성에 대한 혐오는 모든 투사적 혐오와 마찬가지로 분명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언젠가 맞게 될 육체의 죽음이다. 여성이 그 두려움의 (하지만 종종 욕망되는) 조건을 대변한다면, 이는 곧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결국 남성들의 두려움 때문에 여성들이 통제와 규제를 받게 된다. (242쪽)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고 임옥희 님의 글이었다고만 기억나는데, 사실 그것도 정확한 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유는 여성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특별히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5-6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남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여성을 억압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에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과학 기술이 이 정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임신과 출산은 말 그대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이즈만 다른 존재를 눈에 보이지 않게(배만 보이게) 간직했다가(임신), 죽다 살아나는 과정을 통해 쏟아 낸다는 것(출산)은 우주의 신비 그 자체이다. 초기 인류에게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을지는 더 이상의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다. 두려움은 혐오로 이어지는데,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근거였던 임신과 출산이 이제는 ‘혐오’의 근거가 된다. 여성은 월경을 하기 때문에, 임신을 하기 때문에, 출산을 하기 때문에 ‘더’ 동물적이라고 여겨진다. 


편파적인 생각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대인은 거짓말쟁이라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은 성적 에너지에 사로잡힌 존재라던가, 아랍계 이주민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라던가,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타 집단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 모든 집단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하게 ‘동물성’의 상징이 되었던 ‘여성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 여자가. 감히 여자가. 여자 따위가. 이 엄격하고 강력한 굴레의 무게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을까.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홍성수 교수는 마사 누스바움의 핵심 사상이 이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접근하기 쉽도록 쓰였다는 데는 동의한다. 백인 노동자 출신의 자수성가한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는 고등교육과 직업적 성취를 격려하면서도, 뿌리 깊은 인종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기억하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서문>만 읽어도 충분히 좋은 독서가 될 듯싶다. 



이 책이 시작된 날은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날이었다. 비탄과 두려움으로 미국 전체가 들끓었던 밤, 외국의 호텔 방에서 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과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분노, 혐오, 시기와 같은 감정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인들, 특별히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던져주었을 무한의 절망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트럼프는 등장도 화려했지만, 퇴장 역시 화려했고, 그렇게 여러 번 미국에 ‘새 역사’를 선사하고는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모양이다. 2024년을 기약하는 그의 말이 이번에는 제발 이루어지지 말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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