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Oct 24. 2021

포기

예비예비신부 2

당연히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종교 없이도 세상은 돌아가고, 신부의 길을 포기한 동기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너무나 잘 살아가고 있다. 불 꺼진 방에 누워 몇 번이고 들여다보아도 한 톨 달라지는 게 없는 성소국과의 통화 내역도 내게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라고. 왜 아닐까. 포기할 만한 때는 10년이라는 시간 사이사이에 나와 함께 있었다.


계속해서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주변에서는 신학교는 대체 뭐 하는 곳인데 대기업보다 들어가기가 힘드냐며 나보다 더 분하고 속상해했다. '신부가 되면 뭘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등은 물론이고, 신앙 자체를 낯설어하는 그들은 내게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을 좇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회로 나오는 건 어떻냐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그 말을 참아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포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봤다. 어쩌겠나. 이게 현실이라는데. 꿈을 다 이루고 살 수는 없다는 현실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진전이 있다는 현실을 30대를 목전에 둔 나는 맨몸으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겠어서 이력서를 써 내려갔지만, 사라진 10년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고졸. 군필이 아닌 의병 전역. 10년간 신학교를 준비했던 사람. 나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이 세 가지 타이틀은 면접관들의 흥미를 끄는 소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 무렵 내게는 '나를 필요로 하는 어딘가'가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스스로에게 했던 암시가 무색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 백, 수 천 명을 거쳐온 그들의 눈동자엔 내가 없었다. 냉철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헤아림 끝엔 불합 통보만이 남았다. 바닥부터 배워나가겠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 있다는 내 말에서는 어쩌면 절실함이 아니라 독기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에 아찔해질 때쯤, 그 독기인지 절실함인지 모를 것을 어쨌든 계약직 아르바이트로 고군분투하는 게 아닌 나의 앞가림을 하는 데에, 올바른 방향으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많이 억울했다. 10년의 시간이 의미 없이 사라지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더라도 납득은 하고 싶었다. 내가 부족해서 안 됐던 일인 채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제 성소라는 게 사라지기 전에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결심하고 다시 찾은 신부님은 생각도 못 한 방법을 제시했다. 보통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신학교에만 갈 수 있는데, 예외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길은 서울에서 약 70km 떨어진, 왕복(Door to door) 6시간에, 닭갈비와 감자빵으로 유명한 춘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포장되었지만 흙이 밟히는 보도블록, 어딘가에서 흘러오는 시냇물 소리, 단정한 머리칼을 한순간에 헝클어뜨리는 매서운 바람까지. 춘천에서의 한 걸음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때도 한 길 앞도 모르지만 옷을 껴입고 일단 발을 내디뎠었지. 이번에도 또다시 길이 시작된 것이다.


춘천이라고 했지만 사실 정확히는 춘천에 위치한 '함흥 교구'에 찾아간 것인데, 이곳이 유일하게 거주지에 상관없이 신학생을 모집하는 곳이었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음이 절로 느껴지는 함흥 교구는 설립 이념이 타 교구와는 조금 달랐다. 기본적으로 춘천 교구와 같은 곳에서 지내지만, 통일이 되고 난 이후엔 함흥으로 건너가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되는 꽤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통일이 된다면'에 대한 숙제를 해가던 코흘리개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통일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혹여나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했으나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켰다. 아마도 내가 은퇴할 때까지 통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게 북한은 '침묵의 교회'라고 칭해진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곳이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숨어서 기도한다.


나는 하느님을 봤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신이 실존하는지에 대해 증명하지도 못 한다. 종교의 억압 아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어나갈 용기도 없다. 누군가에게 나의 믿음을 설파하고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기엔 아직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내가 뭘 전할 수 있을까. 부족한 것 없이 지내온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나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머나먼 춘천에서 길은 다시 열렸지만, 이번에는 수 백, 수 천의 십자가를 등에 지게 생겼다.

이전 01화 탈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