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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24. 2021

인정

예비예비신부 3

서울 교구는 사제도 많았고 신학생도 많았고 예비 신학생들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교구 사제라는 게 사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어졌던 게, TO(table of organization)를 차지하기 위한 파이 게임이 되어있었다. 성당은 지역마다 하나, 많아야 둘씩 있었고 사제가 성당에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한정된다. 주임 신부가 은퇴해야 이제 그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좌 신부가 주임 신부가 되는 것이다. 매년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는 수가 은퇴하는 사람의 수를 아득히 웃도니 서울에서는 진작부터 사제 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울만 유독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도 20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보좌 신부로 지내는 정체 현상이 심하다 보니 신학교에서 내세우는 기준이나 판별하는 면접들도 필연적으로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면접이 정말 살벌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일은 항상 어렵지만, 서울 성소국에서의 면접은 압박 면접에 가까웠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 이상과 동기를 짧은 시간 동안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하기란 힘든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 틈을 파고드는 질문은 예리하기보단 공격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선배의 엄격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너 아니어도 널렸다.'는 갑의 엄포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신부라는 직책은 계급이 아니다. 쓰임이 다르고 모양이 다를 뿐 다 같은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 10년간 지내온 나는 면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가슴 한가운데에 돌덩이가 얹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함흥 교구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느 집단이 그렇듯, 항상 그래 왔듯 면접을 봐야 했다. 교구장 추천 전형으로 준비했으나 탈락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나가겠다는 것을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할까? 물론 살아가다 보면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경우는 더러 있다. 나도 그런 일 하나하나에 새삼 스스로가 비극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아직은 이르지 않나? 이래도 괜찮은 걸까?


함흥 교구 사무처장 신부님과의 면접을 위해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춘천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신발이 젖고 양말까지 젖었다.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는 감히 불청객이 주제를 모르고 왔다고,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귓가에 울려대는 비웃음 같았다. 아직 사무처장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서울에서도 그랬듯 춘천에서도 나는 정이구나. 을도 아니고 병도 아닌 정. 나는 사제가 되고 싶은 거지, 사제들이 하대해도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닌데.


후둑 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복도에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온다. "베드로? 아이고, 미안합니다. 회의가 너무 늦게 끝나는 바람에." 허겁지겁 사무실로 안내한 사무처장은 차를 한 잔 내주면서 면접을 시작하자고 했다. 이 사람도 나의 특이한 이력들을 신앙심 혹은 노력의 부족의 결과라고 말하겠지. 크게 심호흡하며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몇 겹씩 두르고 질문을 기다리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굉장히 귀한 인재네요."


너무나 따뜻한 말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사무처장은 다시 한번 얘기했다. "베드로는 굉장히 귀하고 소중한 성소를 지닌 분이라구요." 10년이라는 시간은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군대를 다녀오고 사제 서품까지 받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수없이 좌절하고 실망했지만 결국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그 자체가 대단한 거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실컷 주눅 들어 완전히 구겨진 사람을 펼쳐주는 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따뜻한 인정의 한 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어진 면접은, 면접이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웠다.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원 부족이었다는 말과 이제라도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게 현명하다는 말로 면접은 끝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불청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어느샌가 다 마른 신발은 더 이상 찌걱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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