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암菩提庵에서의 일몰日沒)
먼 길을 달려 남해로 향합니다.
시간이라는 틀 속에 갇혀 무감각하게 떠밀리듯 흘러와버린 내 축적된 시간의 기록에서 갇혀있던 기억들은 여전히 가슴에서 맴돌지만, 하나하나 또렷했던 어제로부터 어렴풋 해져가는 아련함으로 이어져 기억력의 한계점에 이른 듯한 내 모습을 보는 오늘 이 순간이기도 합니다.
잊혀져 가는 것들.
한 때는 그것으로 하여 마음을 조리거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것들도, 지금은 그냥 그렇게 흘러온 구분되지 않는 내 삶의 일부분으로 남아, 소중했지만 단순했던 내 기억의 저 편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넘겨지고 있었습니다.
영광도,
명예도,
행복도,
아픔도,
내 사랑도,
네 미움도,
내 눈물도,
네 고통도,
그런 웃음도,
그런 이별도,
우리들 삶과 죽음 까지도,
모두가 시간이라는 반복된 틀 속에서 하나하나 어렴풋 해지다, 결국 지워져 가는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누구나가 간과할 수 있는 짧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제는 그러했던 시간이었고,
오늘의 시간은 또다른 갈래길로 기억의 회로가 곁가지를 치면서 그렇게 축적 되어가는 삶의 시간기록은 복잡해져 가지만,
그 한계점에 이르면 그렇게 쌓여가던 복잡했던 시간의 기록들이, 점점, 하나하나, 지워져 가는 것이 우리들 삶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생生의 길은 그러한 기록들이 또다른 사死의 변곡점을 만들며 결국은 나란히 연접한 삶의 길에서 멈춰 서, 생사生死가 없는 허공虛空으로 우리들 스스로는 돌아 가겠지만,
그렇게 갈 길을 알기에 그 어떤 길을 걸어왔던 종국적으로 허허롭게 다가오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리암을 찾아 부처님께 잠시 귀의歸依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물어 가는 2016년의 저 태양 조차도 내일이면 다시 2017년이라는 이름으로 뜨오르겠지만, 우리들 삶의 기록은 우리가 삶을 의존하며 바라보는 매일매일 같은 태양의 수 만큼 시간의 나이테는 늘어가고, 그 축적된 시간 만큼의 무게가 가슴에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흘러온 시간들이 이렇게 2016년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일몰의 시간을 따라 그렇게 무덤덤히 넘어가듯 잊혀져 가겠지만, 채워지지 않는 가슴이 말하는 삶의 언어言語는 언제나 삶의 원점에 그대로 멈춰 서있는 듯한 공허空虛한 느낌 뿐입니다.
허허로운 것이 삶이라지만, 허허롭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삶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지만, 그렇게 무언가로 채워보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또한 오늘의 우리들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태양,
내일의 태양,
같은 태양을 놓고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시간의 일 단락 일 단락 그 구분점들,
그 시간의 구분점에 서서 그렇게 흘러가 버리려는 오늘의 태양을 이렇게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의 벼랑 끝에 서서, 또 이렇게 아쉬움과 허허로움만 남긴 채 또다른 시간으로 다가올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축적된 시간의 주름진 나이테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그렇게 새로운 해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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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1. 오전 일찍 출발하여 남해 금산 보리암으로 향합니다. 오늘의 평화를 희망하고 내일의 행복을 희망하는 여정입니다.
보리암에 도착하자 마자 처사들이 잠잘 방에 짐을 내려놓은 채 저녁공양을 마치자 마자 일몰을 담으려 금산 정상을 바쁘게 올라 갔지만 이미 2016년의 태양은 나를 위해 겨우 눈섶모양 만큼만 남겨놓은 채 사진을 몇 장 담자마자 허무하리 만치 순식간에 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아 ~ 저녁공양을 하기 전에 후다닥 올라와 일몰 사진부터 담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앞섭니다.
저녁 6:30부터 시작된 저녁불공을 시작으로 철야불공과 새벽불공을 마치는 새벽 5:30까지, 함께한 도반들은 밤을 꼬박 샙니다. 나는 내일 돌아갈 승용차의 운전을 위해 새벽 1:00~3:00까지 잠시 눈을 붙히지만 전국에서 몰려든 불자들로 하여 누울 곳이 없어 겨우 사이에 끼다싶이 하여 눈을 붙혔지만 잠을 자지 않은 것과 같았으며, 일어나 새벽불공은 잠자던 곳에 그대로 앉은 채 부처님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5:30에 아침공양이 시작되고 전국에서 몰려온 수 백명의 불자들이 자그마한 보리암에 모여 추운 새벽시간에 공양줄은 끝이 없습니다. 거의 30~40분 줄서서 기다려 아침공양을 마치자 마자 2017년 새해 일출을 담으려 벼랑끝 난간에 기대어 사진을 담기 시작합니다. 광각렌즈롤 망원렌즈로 교환해 멀리서 벌겋게 올라오는 올해의 태양을 담습니다.
보리암으로 철야기도를 하러 오면서 미리 금산의 지도를 살펴 계획했던 한려해상 국립공원인 금산錦山의 아름다움을 내가 갈 수 있는 곳곳의 길들을 모두 걸으며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너무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비단결 같이 고운 금산錦山의 모습, 그 금산의 품 속에 평화롭게 자리잡은 보리암菩提庵, 나는 잠시잠깐 극락極樂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나의 행복이었습니다.
담아온 사진이 무려 750여장이었지만 버리고 싶은 사진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금산 보리암에서의 내 행복기록을 줄이고 줄여 여기에 몇 장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