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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Jun 10. 2019

자기소개, 대체 이게 뭐라고

세상에서 가장 모순적인 글

최근 들어 어려워진 것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는 자기소개를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사춘기를 잘 못 보낸 탓인지 아니면 숱하게 써 내려간 자기소개서에 질린 탓인지, 요즘은 부쩍 나를 소개하기가 꺼려진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자기소개서를 쓰다 과부하가 걸려서 머리나 식힐 겸 쓰는 글이다. 흔히 하는 말로 또 '까일' 것 같은 자기소개를 붙잡고 있다 도망 온 일종의 도피처이다.


나는 누굴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질문이 아닐까 한다. 나에 대한 질문, 과연 나는 누구인가. 생각보다 나를 아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좋아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 간단하게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것부터 조금 더 복잡하게는 특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꽤나 배웠다는 사람들은 특정 시대의 영화 사조까지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것을 얼마큼 아는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문제는 그 깊이가 잣대가 될 때 발생한다.


만약 좋아하는 감독이나 장르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릴까? 꼭 영화를 좋아한다면 '보는' 행위 그 이상의 것들을 향유해야 할까? 단순히 영화 보는 그 자체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스크린 너머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두 시간 남짓 되는 시간을 오롯이 집중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도 굉장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잘 알면 좋겠지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그렇지, 나를 표현하는 것들에는 이처럼 수많은 잣대들이 따라온다. 그리고 이러한 잣대에 얽매이는 순간 나를 설명하기란 한층 더 어려워진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자기소개를 하기 더 쉬웠던 것은 아마 지금은 도식적이고 형식적이라고 부르는 틀에 맞추어 나를 소개하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나이, 거주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등에 따라 나를 소개했으며, 그에 따라 지금보다 훨씬 덜 노골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나를 표현할 뿐이었다. 당시 자기소개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는 모르는 이들 앞에 선다는 낯가림과 부끄러움뿐이었지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중압감과 부담감은 아니었다.


결국 그 고차원적인 중압감과 부담감은 나의 축을 흔들어 놓았다. 좋아하던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아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저 무엇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치관에 균열이 온 것이다. 남들보다 더 특별하고 무엇인가 멋있는 것을 좋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좋아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생각이, 취향이, 가치관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모순적인 글, 자기소개서

요즘 자기소개서에서 스토리텔링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소개하는 그 '틀'이 중요해진 것이다. 단순히 영화를 보기보다는 그 영화를 통해서 영감을 얻어야 하고, 어떤 장면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어야 하며 그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 지금의 나에 이르러야 한다. 단순히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영상 관련 직군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와 같은 서술로는 나를 어필하기에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면서 동시에 가장 예쁜 포장지로 나를 감싸야한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가장 솔직한 글이어야 하는 동시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가장 평가 지향적인 정제된 글이어야 한다. 모순적이다. 포장지는 금방 벗겨질 것이고, 제 아무리 솔직하고 매력적으로 글을 써 내렸다 해도 면접관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글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쏟은 글이 서류 탈락 문자를 받게 된다면, 아주 가끔, 나 자신이 부정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몇 편의 자기소개를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찾아올 긴 시간을 헛되어 보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할 것이고, 적어도 그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늦은 밤까지 자소서를 쓰다 결국 솔직해지기에 실패한 취준생의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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