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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Mar 16. 2020

인턴 생존기 '쭈굴방탱'

04.재택근무와 상추 비빔밥

  2주 간의 재택근무가 끝나간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 저번 주에 영상 편집을 끝내고 다시 발제를 시작했다. 어떤 기사를 영상으로 구성해야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로 만들 수 있을까. 9 to 6, 근무시간 내내 고민을 했지만 제안을 하는 족족 '킬'당했다. 이쯤 되면 발제를 못하는 게 아니라 '킬'을 잘 당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마지막 발제 안은 컨펌 직전까지 갔다가 너무 자극적일 수도 있다는 의견에 '킵(보류)'을 당했다. 결론, 오늘 하루 냈던 모든 발제는 '킬'이다.


  허전한 속을 달래기 위해 저녁을 사러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해 먹거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었겠지만 오늘은 도무지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을 하고 밖을 나섰다. 마침 가성비 좋은 삼겹살 도시락집이 눈에 띄었다. 업무 효능감이 떨어져 속이 텅 빈 오늘 같은 날은 고기가 제격이다. 더구나 단돈 5000원이라니. 월급날만 바라보며 사는 인턴에게 최고의 저녁이다. 마침 집에 상추도 있겠다, 오늘의 저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삼격살 도시락이다.


  그런데 상추가 좀 많았다. 고기를 다 먹었는데도 한가득 남아있었다. 상추를 다시 씻어 보관하기도 애매했다. 여느 자취생의 채소가 그렇듯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안에 먹지 않으면 곧 물러서 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그때 좋은 수가 떠올랐다. 아직 배도 안찼고, 고기 때문에 살짝 느끼하기도 한 게 상큼한 상추 비빔밥을 해 먹으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지독하게 요리를 못하는 나일지라도, 상추 비빔밥 정도는 맛있게 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상추를 찢어서 양푼에 가득 담았다. 남은 밥도 그대로 투하. 마지막으로 엄마표 특제 쌈장까지. 완벽했다. 열심히 비비다 보니 밥이 희끗한 부분이 보이는 게 장이 모자란 듯했다. 그래서 한 큰 술 쌈장을 더 넣었다. 먹어보니 나쁘지 않은데, 맛있지도 않았다. 어딘가 부족했다.


  아 그래, 참기름! 고소한 감칠맛이 빠졌다 했더니 참기름을 빼먹은 것이었다. 이제 참기름만 넣으면 완벽한 상추 비빔밥이 완성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참기름을 둘렀다. 3바퀴나. 비비고 나서 맛이 이상해 급하게 엄마한테 전화를 드리니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었다고 하셨다. 망연자실해서 비빔밥을 바라보니 상추가 참기름에 절여져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믿기 싫은 현실에 다시 한 술 비빔밥을 떠먹어 보았다. 삼겹살보다 느끼했다.


  결국 과한 욕심에 상추 비빔밥을 망쳤다. 어째 오늘은 영 맘대로 되지 않는다. 한 주를 끝내주는 발제로 시작해보겠다는 욕심은 결국 '킬'과 '킵'으로 귀결되었다. 열심히 찾은 주제들은 이미 나와있거나 흥미를 끌기에 부족한 것들이었고, 이목을 끌 수 있겠다 생각했던 주제들은 너무 자극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 헛헛한 속을 달래기 위해 오랜만에 내 손으로 만든 나름의 요리 '상추 비빔밥'은 삼겹살보다 느끼했다.


  참, 참기름에 절여진 상추 같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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