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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Sep 01. 2020

어느 날부터 명언이 와 닿지 않았다

그게 편하니까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기 전, 저녁 6시 이후 나의 삶은 꽤 엉망진창이었다. 지하철에서 배달앱을 켜서 저녁을 시키고 집에 도착하면 시간에 맞춰 도착한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그리고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아직 씻지 않았으니 이불 위에서 자기는 찝찝하고, 바로 씻자니 몸이 피곤해 그렇게라도 잠깐 피로를 푸는 것이다. 겨우 눈을 뜨면 9시~10시. 겨우 몸을 일으켜 간신히 씻고 나오면 11시.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축축한 머리카락이 볼에 붙은 채로 베개에 누워야 하루가 끝나기 전에 겨우 잠에 들 수 있다.


변명을 하자면, 정말 피곤했다. 퇴근 이후 계획적인 삶을 꿈꿨지만 체력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피곤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저 내 입맛에 맞는 '굉장히' 편한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든 그 순간 먹고 싶고, 쉬고 싶고, 자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낼 의지 말이다. 당시의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편한 대로 살고 싶었다. 피곤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래, 피곤은 아주 좋은 변명거리였다.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도 피곤과 같은 아주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나는 내 탓을 잘한다. 보통은 남 탓을 잘한다는데 말이다. 사실 익숙해지면 남 탓보다 편한 게 내 탓이다. 남 탓을 하게 되면 자꾸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고 기대하게 된다. 저 사람만 바뀌면, 지금 환경만 달라지면 내 상황도 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느니 지금 내가 부족해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렇다면 바꿀 것은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보다 나를 바꾸는 편이 더 쉬워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생각이 스스로를 좀먹을 때 나타난다. 반복된 내 탓은 학습된 무기력함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해도 내 탓, 저것을 해도 내 탓. 이 생각이 반복되면 그 어떤 일도 하고자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위험부담이 더 클 수도 있다. 실패하면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눈치를 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내 탓은 버리지 못한다. 못나게 변한 내 모습마저 내 잘못의 결과일 뿐이다.


나는 나로 인해 참 못나져 갔다. 처음에는 잘못을 인정한다는 핑계로, 더 나은 나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다음 편해졌고 이내 포기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결과에 체념하니 힘들 일도, 속 끓일 일도 없었다. 그즈음이었다. 한때 온갖 명언, 격언들에 심취해 자기 발전을 목표로 삼았던 내가 명언은 다 성공한 사람들의 멋들어진 말이며 나같이 특별할 것 없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때가.


타고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나와 출발부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이 되었다. 지금에야 되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참 어리고 철없었고 못났었다. 사춘기가 뒤늦게 잘못된 방향으로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부터 1년 동안 내가 초라해진 이유를 찾아 헤맸다. 이때부터 남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들었던 누군가의 말, 내가 내 탓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탓을 말이다.


5년. 그렇게 '탓'을 하며 보냈다. 나를 핑계로, 남을 핑계로 5년을 참 편하게도 살았다.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말리지 않은 채 이리저리 뭉쳐져 널브러진 머리카락처럼 정돈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도 내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 '때문에'라는 부정적인 사고의 흐름 대신, 나'로 인해'라는 중립적인 사고를 해보려 한다. '덕분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극단에서 나타날 부작용으로 인한 조심스러움 때문이다.


앞으로 5년이 흘러 29살, 30살이 되었을 때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도 여전히 속앓이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결의 고민은 아니었으면 한다. 조금은 다른, 확장된 시야에서 나를 바라보는 글, 그동안 '탓'에 머무르느라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고민들을 이어가는 글을 쓰고 발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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