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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Sep 10. 2021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

짧지만 솔직한 시간을 함께 했던

  다들 뭔가를 그만두고 온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랬다.
  2주 전, 나는 무작정 제주도로 도망쳤다.

# 서울

누군가의 아메리칸드림처럼, 내게는 서울 드림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PD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밤을 새우고, 공부를 하고, 꾸역꾸역 성장했다. 그렇게 서울로 대학을 왔다. 서울에서 취직도 했다. 인생의 가장 큰 목표를 이룬 순간이었다. 그런데 성취감은 찰나더라. 인생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부분에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건 그저 한 순간일 뿐. 기쁨도 슬픔도 그저 스쳐가는 잠깐의 감정이었다. 수많은 파도 속에서 덤덤하게 살아야 하는 걸 깨달은 순간, 나의 서울은 화려한 색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짙은 회색과 연한 회색만이 남았다. 공드리의 영화 ‘무드 인디고’처럼, 내가 보고 듣고 겪는 이 도시는 점점 단순해지고 단조로워져 갔다.

# 제주도

그렇게 쫓기듯이 제주도로 내려왔다. 아무도 나를 제주도로 보내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온 거다. 다만 도망 온 것뿐. 처음 일주일은 정말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 바다만 보는데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쉬러 왔는데 오히려 생각만 많아졌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뭔가를 그만두고 온 사람들이었다. 회사를 그만뒀거나 사랑을 그만뒀거나 공부를 그만뒀거나. 인생에서 꽤 많이 애정과 에너지를 쏟고 있던 것들을 끊어내고 온 이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고 떠들면서도 늘 마지막에는 일정한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깊숙한 곳에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날이면 각자의 길을 가고 다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걸 보니,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면서도 앞으로 어디서 만나 무얼 할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지금 함께 이야기하는 언니, 동생, 친구가 편하고 좋으면서도 계속 볼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슬픈 공감대를 만들어 가면서. 과거에 대한 유대감은 쌓여갔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함께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좋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제법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짧지만 솔직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발톱을 쳐들어 나를 지킬 필요가 없으니 오롯이 ‘나’로서 상대방을 대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마 다들 그게 좋았을 거다.

그렇지만, 이 아쉬움 만남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

# 어딘가

명암의 깊이다. 내일이면 제주도를 떠난다. 짧은 2주 간의 생각 정리를 끝내고 다시 서울 어딘가에 있을 자취방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그곳은 명과 암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만난 수많은 빛들. 빛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그림자. 그들이 보여준 명암을 서울에 덧칠하다 보면 나름의 깊이감이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그 예전의 단순한 빛과 어둠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 다양하고 화려한 색조만이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아닌가 보다. 도시에 사는,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또 다른 결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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