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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Feb 09. 2022

[낙서04] 찌드는 게 좋은 이유

평생 찌들어 볼 생각이다


직장 탈출 3주 차. 사회에 아주 살짝 발을 담그고 돌아온 취업준비생은 문득 궁금해졌다. ‘왜 사회에 찌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할까?’


찌들다
좋지 못한 상황에 오랫동안 처하여 그 상황에 몹시 익숙해지다


1. 좋지 못한 상황

사회에 찌든다는 표현을 쓰려면 우선 <사회=좋지 못한 상황>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할 텐데. 사회는 정말 좋지 못한 상황으로 가득 찬 곳일까? 비록 1년 남짓이지만, 적어도 그동안 겪은 사회는 좋지 못하다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쉽지만도 않은 곳이었다. 저마다의 사정과 입장이 다르기에 갈등이 발생하기 부지기수. 잘 해결되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는 진정한 정글의 면모를 드러냈다.


2. 오랫동안 처하여

첫 회사 5개월, 두 번째 회사 4개월. 합계 9개월. 인턴 기간보다 짧은 정규직으로의 시간. 확실히 사회생활 초짜 중 초자라 할 수 있다. 지난 9개월은 갈등 해결의 시간이었다.

참 많이 고민했다.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샤워를 하고 나면 바닥에는 늘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어떤 날은 출근길이 두려워 차 창밖을 바라보며 손톱을 뜯기도 했다. 그럼에도 출입증을 찍고 들어가면 제 몫을 해내야 하는 곳이 회사였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


3. 좋지 못한 상황에 오랫동안 처하여

그래, 사회. 쉽지 않다.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의 생업이 모여 굴러가는 게 사회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어쩜 나도 마찬가지.


4. 그 상황에

20대 초반에는 남들의 눈물에 공감을 했다. 더욱 깊은 동감을 해주지 못하는 게 속상했다면, 지금은 내 눈에서 흐르는 것들이 제일 마음 아프다. 대학생 때는 길거리의 꽃을 봤다면, 지금은 길거리의 신호등만 바라볼 뿐이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는 순간, 이미 몸보다 앞서 나가 있는 오른발에 체중을 실어 급히 목적지로 향할 뿐.


5. 몹시 익숙해지다.

한동안 예전의 나는 이러지 않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예전의 내가 과연 성숙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느끼는 법은 알았어도 다루는 법을 몰라 매일 밤 고민하던 날이 많았다. ‘어리다’는 말이 ‘어리석다’에서 기원했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던 나날들이었다.


서툰 모습을 다듬어 나가게 되던 시기가 바로 인턴을 시작하면서 였던 것 같다. 사회생활 미리보기를 통해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아니란 걸 배웠다. 그때부터 어른, 사회인은 어때야 하는가 고민하며 직장인이 됐다. 그렇게 또다시 좌충우돌 시간을 보냈다.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어느 날은 많은 것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독히도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제법 의연해졌다고,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도서관으로 거리낌 없이 발을 옮기는 것도, 시험에 떨어져도 그러려니 다시 문제를 풀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지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감각에 익숙해지다 보니 무뎌졌고

무뎌짐에 익숙해지다 보니 의연해졌다.


6. 그 상황에 몹시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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