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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Dec 17. 2018

‘오늘’이 내편이었던 하루

데시마미술관(Teshima Art Museum)에서

버스는 굽이굽이 선착장 반대편 고개를 넘었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데시마미술관이 보였다. 외관이 무척 흥미로웠다. 언덕 위에 내려앉은 숲 속의 UFO 같았다. 기대를 안고 들어섰다.


여기가 미술관이야? 뜻밖이었다. 실내는 기둥이 없는 하나의 너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두 개의 둥근 원이 뚫려 있었다. 그 위로 햇볕이 들고 낙엽이 떨어졌다. 재미난 구조였다.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무엇보다 미술관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전시 작품이 없었다.  나선으로 경사진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 여기저기에서 물방울 한두 개가 솟아났다. 물방울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중앙으로 흘렀다. 하나의 물방울이 다시 다른 바닥에서 솟은 물방을 만나 작은 줄기를 이뤘다. 그 줄기가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얕은 물웅덩이를 이뤘다.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은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지켜야 할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떠들면 큐레이터가 다가와 속삭였다. 사람들은 볼 게 없으니 편한 자세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끔씩 자리를 옮기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체로 고요했다. 한강에서 열렸다던 ‘멍때리기대회’가 생각났다. 



나는 적당한 데 자리를 잡았다. 볕이 잘 드는, 막 솟아난 물방울 옆이었다. 고개를 드니 열린 천장 위로 하늘이 파랬다. 흰 구름이 둥근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가 천천히 흘러나갔다. 시간은 무료하게 흘렀다. 나는 사람들과 물방울을 헤아리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쳐다보다 그마저 지루해지자 바닥에 몸을 뉘었다. 몸 전체로 고요와 침묵을 만지고 싶었다. 목적 없는 시간이 익숙해질 때까지 누워 있었다. 바스락 하는 몸짓들이 들렸다. 그대로 좋았다. 물론 잡념의 물방울이 간간이 솟아났다. 떠나기 전 도시의 일상이나 그저 그런 여행의 기억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망상이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천장으로 스민 햇살이 얼굴까지 번져 있었다. 그늘은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볕을 쬐며 조금 더 누워 있었다. 나는 ‘밑 빠진 독’이 되었다. 무언가가 채워졌지만 곧 빠져나갔다. 몸이 웅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물방울과 물방울이 만나 물방울로 흘러가는 표정을, 여전히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 몇 개가 미술관 천장으로 우아하게 떨어졌다.

“좋네.”

나는 큐레이터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자리 사람이 싱긋 웃었다.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네 기분은 알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구라는 베개를 벤 채 같은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 출처 : http://benesse-artsite.jp


미술관을 나와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논길을 걸었다. 자투리 땅에는 간이 의자를 좌판 삼은 가판대가 놓여 있었다. 진열 궤짝에는 주먹 만한 감귤이 가득했다. 주인 없는 자율판매대였다. 손으로 쓴 글씨가 정겨웠다. 

‘여름 감귤이 한 개 100엔입니다.’

달다 말다는 말도 없이. 나는 또 “좋네”하고 혼잣말 했다. 그리고는 100엔 동전 하나를 넣고 오렌지처럼 생긴 감귤 하나를 꺼내먹었다. 손끝에서 새콤한 여름 향이 피어났다. 더위가 시큼하게 씻겼다. 가판대의 손 글씨가 한 번 더 인사했다.

‘いつも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언제나 감사합니다.)’

처음 봤는데 ‘언제나’라니. 그런데,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오늘은 무엇이든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Teshima Art Museum #테시마아트뮤지엄 #다카마츠 #Rei Naito #Ryue Nishiz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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