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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22. 2023

행운

내 곁에 처음 온 사람


12월 31일이었다. 당신과 나는 서해에서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기로 의기투합한다. 우리는 새해의 첫 해가 주는 생기보다 한해의 마지막 해가 주는 여운이 더 좋았다. 하필 왜 그 흔한 대천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이 흔한 대천이라 한해의 마지막과 잘 어울린다 생각했을 수 있다. 아니면 그저 흔한 비용 문제였을 수

도. 어쨌든 한해의 마지막 해가 지고 있다.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큼 크고 도발하듯 이글거린다.

“잠깐만.”


나는 당신 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카메라를 든다. 셔터를 몇 번 누른다. 붉은 빛이 조금 더 짙게 번지고 있다. 파도가 멈추는 모래사장 끝에 나란한 연인이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은 다정 하게 팔짱을 낀 채 먼 바다를 응시한다. 태양은 생각보다 빨리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다. 나는 맘이 급해져 앵글을 바꿔가며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태양이 수평선 위로 완전히 잠긴 후에야 정신을 차린다. 


뒤를 돌아보니 당신 혼자 남아, 노을 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실수를 들키지 않게, 시침을 떼고, 천천히 뒤돌아 걷는다. 당신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해가 진 바다를 등지고 당신 곁에 선다.

“다 찍었어?”

“응.”

눈치 채지 못한 건 나였다. 당신은 내가 머쓱하지 않을 만큼 웃는다. 뒷머리라도 긁적거려야 하나. 


우리는 뒤늦게 나란히 해가 지고 난 후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아직 하늘은 파랗고 수평선은 붉다.

해가 없어도 바다는 아름답다. 그 풍경은 그 풍경대로 좋다. 내 사진 속에 머물던 연인이 자리를 뜬다. 당신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내민다.

“예쁘지?”

일몰과 나를 찍은 사진이다. 나는 사진 속 내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종종 출장길에 엄마와 동행하곤 했다. 바람이라도 쏘이시라고. 같은 장소에서 나는 나대로 일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여행했다. 엄마는 한참을 혼자 돌아다니다 다가와서는 ‘여행작가니 꼭 찍어야 할 것’이 있다며 나를 부른다. 흔한 들꽃이거나 나무거나 숲이거나. 엄마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들. 그러나 내 작업에는 필요 없는

풍경들. 그럴 때 나는 말없이 엄마가 가리키는 걸 몇 장 찍고 돌아서기도 하고, 방해받은 흐름에 심심한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럼 엄마는 엄마 대로 또 다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여행했다.


엄마는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꼭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그날의 여행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그 사진 안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많았다. ‘여기는 어디냐?’라고 기어이 묻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들, 엄마의 마음을 채우는 따뜻한 감성들. 그리그 그 사진 가운데 한두 장은 카메라를 든 내 뒷모습이 껴있었다.

“예쁘지?”


엄마는 그때마다 내 뒷모습 사진을 보며 말하곤 했다. 예쁘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인생에는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가운데는 나와 상관없다 믿었던, 믿기지 않는 게 더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쓸쓸해 나는 한동안 그 모든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두려워지곤 했다. 당신은 그 가운

데 다행한 경우, 운수 좋은 거짓말. 엄마가 떠날 때 내 곁에 있던 사람, 그러니 엄마가 떠나고 내 곁에 처음 온 사람. 내가 나를 조금 더 믿어도 괜찮겠다는 거짓말.


사진은 정지한 화면인 것 같지만 살아있는 장면이다. 생기를 불어넣으면 생기롭고, 화를 섞으면 불꽃처럼 타오르고, 환희에 찰 때는 찬란하다. 그리고 사랑을 담으면 때때로 반성을 부른다.

“미안.”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당신에게 사과한다.

“괜찮아.”

당신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 안에는 이미 내 일몰 사진 만큼이나 많은 내 뒷모습이 담겨 있겠지. 필요 없는 것들을 끌어안으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다가 조금씩 어두워진다. 흔한 오늘이 끝나간다. 나는 당신 손을 꼭 쥐어본다.





#여행의사람

#행운

#못다한사랑안에거하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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