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게 있다는 걸
눈을 뜨니 오전 8시다. 햇살이 커튼을 뚫는다. 일 년 내내 여름인 이 나라가 부럽다. 더 누워 있을까 하다 몸을 일으킨다. 포트에 물을 끓인다. 여행 첫날 아침.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이 집을 택하기 잘 했어.’
숙소는 도시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다. 개성 있는 동네란 건 도착해서 알았다. 그보다 검색하며 본 거실 사진에 반했다. 커피를 마시며 내다보는 창밖은 그대로다. 창문이 활짝 열리지 않는 게 좀 아쉬웠지만 그것만 빼면 만족한다. 맘에 들지 않은 열 개보다 정말 좋은 하나면 됐지. 하물며 이 집에는 마음에 드는 게 더 많다.
창밖에 가로수가 얼마나 무성한지 3층 거실 창문을 열면 잎사귀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그 푸른 나무와 건너편 빨간색 벽돌 건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린다. 무엇보다 이 집에 어린 앤의 취향이 좋다. 그녀가 그린 그림과 그녀가 수집한 소품이 집안을 장식한다.
나는 그녀의 집을 나흘 빌렸다. 집을 빌려 묵는다는 건, 그 사람의 취향을 빌려 묵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택한 집과 더불어, 내가 택한 그녀의 취향에 스스로를 한 번 더 칭찬한다.
당신은 아직 자고 있다. 깨울까? 아름다운 아침인데. 잠깐 갈등하다 생각을 바꾼다. 조금만 더 나의 시간을 갖자. 집 밖에 나오니 사람들이 바삐 오간다. 그렇지. 저들은 출근할 시간이지. 괜히 으쓱하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고나서는 샛길로 접어든다. 예쁜 카페가 여럿이다. 그 앞을 지나며 아침에 마신 커피를 후회한다.
조금만 더 참거나, 조금만 더 일찍 나올 걸 하며. 모퉁이를 돌자 이번에는 ‘farmer's market’ 간판이 보인다.
아침의 마켓 풍경이 궁금하다. 지하로 내려선다. 단정한 식자재 판매대가 도열해 반긴다. 사과, 파프리카, 자주 양파 등이 색깔 별로 가지런하다. 나는 일일이 손을 내밀어 인사한다. 너무 말끔하게 반짝거려 정감이 덜
하기는 해도 그곳만의 질서가 흥미롭다.
그냥 떠돌기 머쓱해 장바구니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고 슬금슬금 나도 모르게 식자재를 고르고 있다. 샐러드로 쓸 야채와 과일을 사고, 베이컨과 빵을 사고. 그러다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다. 아침 산책이 길어졌다. 돌아가면 이른 점심이겠다. 다시 점심거리를 산다. 닭고기를 조금 사고, 소스를 고민하다 직감만으로 몇 가지
를 고른다. 양파와 감자를 조금 사고 머릿속으로 레시피를 그린다. 그 모습이 기분 좋게 어색하다. 나는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닌 데 이곳의 나는 무엇을 요리할까 궁리 중이다. 어느새 장바구니가 무겁다. 마켓을 나와서는 낑낑대며 숙소로 향한다.
“며칠 먹을 거야?”
배고프다 보채던 당신은 양손에 들린 식재료를 보고 놀란다. 다시 보니 너무 많다. 이번 여행은 집안에서 며칠을 먹게 생겼다. 나는 당신을 위해 포트에 물을 끓인다. 당신은 아침의 나처럼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창밖을 본다.
“이 집은 창밖 풍경만 봐도 걱정이 사라질 것 같아.”
내가 찾았지! 거들먹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직감으로 고른 재료를 섞어 소스를 만들고, 올리브유를 두른 다음 닭고기를 볶는다.
“웬일이야?”
‘여행의 일’이라고 답한다. 얼기설기 조리한 요리는 그럼에도 그럴싸하다. 우리는 플라타너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건너편 빨간 벽돌집을 배경으로 이른 점심을 먹는다.
“좋은데.”
무어든 좋다니 좋다. 좋은 게 있다는 것, 그걸로 또 좋은 거지.
모든 건 여전한데 또 모든 건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는 9층 아파트에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가 보이는 3층 집에 있다. 어제의 나는 슬펐지만 오늘의 나는 여유를 찾았다. 지금은 내 손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있다. 나는 다음 여행에도 주방에서 이상한 요리를 만들고 있을까. 그때도 재미있다면 여행지에서 요리하는 건 내게 새로운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래봐야 당신과 함께 마주앉을 식탁을 차리는 정도가 되겠지만, 그래도 그런 아침이 기쁨을 준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로 인해 상실 대신 내일을 꿈꾸어가겠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여행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것도. 이번 여행은 운이 좋았을 수 있다. 모든 여행이 이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여행이 난감했듯. 그럼에도 살아가다 보면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온다. 내가 나를 조금 더 사랑할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요리가 환희는 아니지만 슬픔 쪽에서 기쁨 쪽으로 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무엇보다 고작 잘 고른 숙소 하나가 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건 꽤나 희망찬 일이다. 약간의 수업료는 필요할 테지만 그게 여행이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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