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막상봄
내게는 노트북 키보드가 필기구다. 노트북 키보드는 쏟아지는 생각을 거침없이 받아낸다. 서걱서걱하며 바닥을 쓸어 미는, 연필은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르기다. 키보드에서 나는 서걱서걱은 생각이 서성대는 소리라 그리 달갑지 않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오늘의 일이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손끝에서는 부드럽게 눌러지지만, 소리만은 경쾌하고 빠르게 번지는 키보드를 좋아한다.
아내는 목수다. 그녀가 쓰는 목수연필은 납작하다. 연필의 몸통도, 열필심도 가로로 길게 퍼진 직사각형이다. 필기구란 생각을 적는 거라 여기지만, 목수에게 연필은 위치와 수치를 표시하는 도구다.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 나아가야할 거리와 멈춰야 할 수치의 정의다. 가끔은 '나보다 생각이 분명한 일이군'하고 느낀다.
목수 아내는 생각을 적을 때도 키보드보다 펜을, 펜보다는 연필을 선호한다.
“부드러운 건 속도가 빨라서, 생각의 속도와 손의 속도가 달라. 내 생각과 보조를 맞추는 느린 필기구가 좋아. 스윽스윽 미끄러지는 느낌보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바닥 위에 오래 머무는 필기구를 좋아해.”
아내는 속도 이야기를 하지만 내 보기에는 손끝에 느껴지는 글씨나 선의 질감이 그녀의 선택 기준이다. 거친 나무 위에 목수연필로 서걱서걱하고 선을 긋거나 점을 찍을 때, 귓가에 닿는 소리의 질감은 무심한데 따뜻하다. 내가 듣기에도 좋다. 그리고 손끝에 담는 그 질감을 감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때,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아내의 목수연필을 들여다보며 ‘생각의 속도’에 대해 생각한다. 몸을 쓰는 일과 머리를 쓰는 일의 차이는 서걱서걱과 타닥타닥 만큼 다르다. 우리가 같은 분량의 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있을 때 마음이 급해 서두는 건 늘 내 쪽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다.
연필을 쓰면 내 생각의 속도가 조금은 느려질까. 느리게 산다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겠지만, 괜히 아내의 목수연필을 만지작대는 하루다. 물론 이 글 역시 생각을 놓칠세라 타다닥 타다닥 키보드를 두드려 써나가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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