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인사는 ‘안녕’이다. 그 다음은 이름일 때가 많다. 이름을 말한다는 건 당신을 속일 의도가 없다는 의미다. 경계를 허물고 빗장을 열며 조금은 곁을 주는 셈이다. 그래서 출입국의 첫 절차가 내 얼굴과 이름을 밝히며 ‘무장해제’ 표시를 하는 거겠지.
외증조할아버지가 처음 지어준 내 첫 이름은 ‘상태’였다. 아버지는 태양, 태극기, 태초의 그 ‘태(太)’가 마음에 안 드셨나보다. 며칠 지나 그 ‘태’를 준수, 준걸의 ‘준(俊)’으로 바꿨다. 상태보다 상준이 조금 더 세련된 발음의 이름이라 여기셨던 것 같다.
“이름이 뭐야?”
“쟌”
나는 ‘쟌’하고 불러본다.
“너는 이름이 뭐야?”
“상준. 준이라고 불러.”
쟌과 나는 조금 전 만났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이름에 관한 단락이 마음에 들어 그 문장을 잊지 않으려 밑줄을 긋고 있었다. 그는 책 제목을 보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다른 언어지만 이름의 발음이 비슷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해졌다.
한국 이름에는 한자의 뜻이 숨어 있어. 상준은 ‘같이 커간다’는 의미. 영어로 하면 ‘win-win’.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야. 하지만 여자 친구는 나를 ‘상춘’이라고 불러. 우리? 우리는 제주도라는 섬에서 여행하다 만났지. 거기서는 아저씨를 ‘삼춘’이라고 부르거든. 누군가 내 이름과 섞어 잘못 부른 ‘상춘’을 그녀는 좋아해. 상준보다는 촌스런 이름이라 좋다나. 맞아, 그녀는 아날로그적이야. 그녀의 어떤 친구는 나를 ‘늘 봄’이라고도 불러. 상춘을 한자로 쓰면 ‘늘 봄’이라는 의미가 있거든. 우리는 그녀의 친구가 붙여준 의미를 좋아해. 그녀가 나를 부를 때 우리 사이가 ‘늘 봄’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곤 하지.
쟌은 내가 건넨 구글 번역기의 몇 자를 이해했을까?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말들은 번역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내게 여러 개의 애칭이 있다는 것과 그 가운데, 연인이 지어준 상춘과 연인의 친구가 덧붙인 ‘늘 봄’이라는 뜻 정도를 이해했을 것이다.
“낭만적이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쟌이 준에게 말한다. 맞다. 나 역시 꽤나 로맨틱하다 생각한다. 이름이 사랑을 만나 변해가다니.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새롭고 싶고 내가 아닌 나이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 모습이 내가 원하는 나이기를 바라는. 나는 그런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난기’였다. 호적에 올린 이름이 그랬다. 그녀는 어른이 된 후 이름을 적을 일이 있을 때마다 ‘난’을 꼭 ‘란’으로 썼다. ‘난기’는 남자 이름 같다고, ‘란기’라고 쓸 때 더 예쁜 이름 같다며. 언제부터인가 서류상에 쓰이는 그녀의 모든 이름은 신기하게도 ‘란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삶은 ‘난’일 때보다 ‘란’일 때 아름다웠을까? 나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병원 침대에 누워 입모양만으로 나를 불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산소 관을 문 그녀의 입모양이 내 이름을 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많이 불렀을 이름, 또 한 때는 그녀의 이름이기도 했을 이름, 그녀는 오랫동안 ‘상준 엄마’였으니까. 나는 가끔 유물처럼 남겨진 그녀의 여권을 만지작거린다. 영어로 적힌 그녀의 이름 역시 Rangi다.
사람의 인생은 그 이름의 미래 같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을 온전하게 살아내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만.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나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는다. 학교였다면 졸고 있는 나를 깨우는 부름이었겠다. 회사였다면 아마도 뭔가 조금 잘못 처리된 일이 있었을 지도. 병원이었다면 나는 병명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이곳은 버스터미널이다. 지금 내 이름은 여행 중이다.
“상춘, always spring”
쟌이 배낭을 챙기며 내 이름의 영어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가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늘 봄”
너의 여행도 늘 봄이기를.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어지간해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그제야 쟌의 이름이 궁금하다. 그는 내게 그냥 ‘쟌’으로 기억되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다. ‘바이, 쟌’ 할 때 그의 이름 발음이 웃는 표정이라는 걸 안다. ‘쟌~’하고 웃자 그가 ‘V’를 그리며 화답한다.
내가 밑줄 긋고 있던 책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었다. 책 속 이름에 관한 단락은 이렇다.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이 문장을 잊지 않으려 한 것일까. 쟌이 떠나고 곰곰이 생각하니 아마도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 문장 안에 담겨있다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안녕’도 없이 떠나갔을 때, 호명되지 않은 시상대의 상실과 좌절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랑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였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떠난 사랑은 빈 채로 남는다 .
또 생각하니 그 글 속의 이름이 마치 여행 같아서다. 오늘처럼 낯선 도시의 버스 대합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처음 부를 때, 나는 내게 그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내가 그 아름다운 이름의 주인공이라는 걸,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아직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은 미래들과 방황하는 잠재의 힘들과 격렬하게 부딪치는 소망들 그리고 사랑을 일으켜 세울 용기들, 내 이름 안에 그런 비밀이 있다는 걸, 내 이름 안에 바이칼보다 큰 호수가 있다는 걸 굳건히 믿게 된다. 내 이름을 가장 사랑스럽게 부르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여전히 몹시도 쓸쓸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