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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30. 2022

grandmother's song

조카들은 재미난 놀이처럼 미술관 바닥 분수 사이를 오가다 내게 손을 흔든다. 나는 그림 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제목이 ‘grandmother's song’이다. 파란색 바탕 위에 가느다란 흰 선으로 할머니의 윤곽만 그려낸 작품이다. 심령사진 같기도 하고, 깊은 바다 같기도 하고, 막 어둠이 내린 밤하늘 같기도 하다. 

작가는 원주민인 할머니를 잃은 후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작품 안에서 은은하게 읊조리는 할머니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미술관의 크고 작은 소음들이 들린다. 그 소리가 옅어질 때 즈음에는 여든일곱 살에 세상을 떠난 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10년 정도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다녔다. 나를 꼭 ‘우리 손주’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할머니의 자랑이 된 것 같아서.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몫까지 담아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서.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이 또 하나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할머니는 두 번 접은 만원 지폐 몇 장을 슬그머니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며칠 지나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축 조럽’이라 적힌 편지 봉투를 봤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배운 적이 없는 할머니는, 육남매를 키우며 곁눈질로 한글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맞춤법보다 위대한 말과 글의 법칙을 배웠다.  


“삼촌.”

조카가 나를 부르며 다가온다. 나는 네게 삼촌이구나.

“그림, 맘에 들어요?

“어, 제목이 할머니의 노래야.”

나는 조카에게 증조할머니가 되는, 내 할머니가 어떤 분이지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 할머니는 저기 있는데.”

조카가 뒤쪽 입구를 가리킨다. 거기 조카가 할머니라 부르는 내 엄마가 있다.


엄마는 휴대폰을 들어 작품 사진을 찍고 있다. 실제 크기보다 다섯 배 정도 큰 여인 형상 조형물이다. 내게 몇 번이고 ‘신기하다’ 말했던 작품이다. 큰 여인 옆에 서니 엄마가 아이처럼 작다. 엄마는 두 번째 사진을 찍으려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조카와 나는 나란히 화답한다. 우리 모두는 미술관 안에서 서로에게 신호한다. ‘할머니’, ‘엄마’ ‘아들’ ‘손자’ 하고.    

다정한 시간이 조바심친다. 우리에게 남은 여행은 얼마나 될까? 우리에게 남은 사랑은 얼마나 될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다했을 때, 우리는 오늘을 기쁘게 추억할 수 있을까? 


손을 흔들어 신호하던 엄마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조카와 나를 찍고 있다. 

‘웃어.’

엄마가 입으로 말한다. 우리는 엄마 앞에서 활짝 웃는다. 할머니가 좋아서, 엄마가 좋아서 따라 웃는다. 저만치서 웃는 엄마 얼굴이 고저 없는 노랫소리 같다. 언젠가 우리가 그리워 할 노랫소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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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나는 이리 적어두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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