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나무 너무 예쁘지 않아.”
차는 삼거리에서 멈춘다. 동생이 사는 동네 입구다. 정면 신호등 옆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단박에 눈길이 가는 아름다운 나무는 아니다. 수령은 10~20년 정도 돼 보인다. 큰 몸집으로 시선을 끌 만한 나무도 아니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또한 나무의 고유한 성질에 가깝다. 다만 서 있는 위치가 조금 외딴 자리다. 뒤편이 너른 초지라 배경 삼은 파란 하늘 아래 홀로 도드라진다.
나무는 가지가 성글어 바람이 불자 간신히 흔들린다. 그때 즈음 조금 다르게 보인다. 말을 거는 듯했는데 그 의미를 알아듣기 전에 신호등이 바뀐다. 길을 바꿔 달리며 동생이 덧붙인다.
“나무는 그 전에도 저기 있었거든. 그냥 지날 때는 몰랐는데.”
이사 오고 나서 한 동안은 그냥 지나친 삼거리였다. 거기에, 그 나무 곁에 신호등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무가 보였다. 동생은 집에서 나와 신호를 기다리다 나무와 눈을 맞추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했다. 나는 지나온 삼거리를 돌아본다. 동생 말 속 나무가 엄마 같아서. 동생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 얼굴을 닮은 나무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지난여름, 무더위를 피해 캠핑장에 갔다. 측백나무가 우거진 숲 속 캠핑장은 적어도 열대야는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오토캠핑장이라 각자의 오두막이나 텐트 사이트까지 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두막과 샤워장을 오가는 길바닥에는 ‘서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가는 차들에게 건네는 주의 표시였다. 나는 샤워장을 걸어 오갈 때마다 그 앞에서 잠깐씩 멈췄다. 낮에는 멈춰 서서 개울 물소리를 들었다. 밤에는 멈춰 서서 별을 헤아렸다. 그때마다 엄마가 생전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 애쓰지마. 애쓰지 말고 편하게 살아”
그럼 나는 매번 비슷한 대답을 하곤 했다.
“엄마, 모두 그 정도 애는 쓰며 살잖아. 돈 버는 데 쉬운 게 어딨겠어.”
엄마에게 나는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을까. 그저 모든 엄마에게 아들은 애틋한 존재니까. 아니면 살아보니 삶이란 그리 애쓴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더라는 의미였을까. 돌아보면 엄마는 내 인생에 ‘서행’ 표시 같았다. 엄마가 떠나고 나니 내게 ‘애쓰지 마라’ 말하는 이가 없다. 나는 여전히 애쓰며 지내는 날이 많은데 그때마다 엄마 말이 떠오른다.
‘너무 애쓰지마’
엄마가 떠난 다음부터는 여행을 떠올리면 그날 보았던 ‘서행’ 표시가 자꾸 떠오른다. 신혼여행으로 판문점에 갔다는, 그날이 하필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된 날이었다는, 서울에서 탄 택시가 더는 갈 수 없다해 파주 어디 즈음에서 돌아섰다는, 돈가스에 김치가 없어 목이 멨다는, 엄마의 여행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끝나고 말았지만. 신호등 앞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처럼 당신의 목소리는 내 여행의 길목에 남아 메아리친다.
“그래도 너무 애쓰지 마. 사람 사는데 소중한 게 참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