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에세이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를 쓴 허혁 작가는 ‘버스 운전대만 잡으면 누군가 자꾸 이야기를 불러주었다.’고 했다. 그것은 친절과 불친절로 나뉠 수 없는 생활이기도 해서, 나는 행선지를 물어도 대답 없는 버스기사를, 막 출발하려는 버스가 문을 다시 열어주지 않는 이유를, 어제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기사’였던 그가 오늘은 왜 ‘가장 비열한 기사’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또한 다가오는 버스를 보며 ‘정류장 뒤로 몸을 숨겨주는’ 행동이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배려라는 것을, 지켜보며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하루를 시로 써나간다. 예를 들면 아침에 시리얼을 먹으며 만지작거렸던 성냥이 떠올라, 버스 운행을 시작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이런 시를 쓰는 것이다.
*‘We have plenty of matches in our house
We keep them on hand always
Currently our favorite brand is Ohio Blue Tip’
이것은 시일까? 패터슨시 태생의 <패터슨>이라는 시집을 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읽고 나면 그 모든 날이 시적으로 보인다. 보통의 일상을 예사스럽게 적어나간 그의 시는 마음을 적시는 가랑비 같다. 아주 특별한 날만 모여 글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든 날은 인생’이고 우리의 평범한 날들 역시 시처럼 읽힐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영화 <패터슨>은 뉴저지 패터슨시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며 틈틈이 시를 쓰는, 패터슨시 태생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좋아하는 버스운전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일주일이다. 월요일 아침에서 시작해 월요일 아침에서 끝이 나는데, 처음과 끝이 똑같다.
그는 월요일 아침 6시 경에 일어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에게 입을 맞추고,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버스가 운행하기 전 버스에 올라서는 어제 또는 오늘 아침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잠시 시를 쓴다. 버스가 출발하고 승객들이 탄다. 패터슨은 운전대를 잡고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종종 승객들의 이야기에 혼자 웃는다. 점심에는 그가 좋아하는 폭포가 보이는 공원에서 아내가 준비한 점심을 먹는다. 그때 또 시를 쓴다.
운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와 저녁을 먹은 후, 잉글리시불독 마빈과 산책한다. 저녁 산책을 갈 때는 꼭 닥이 운영하는 단골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이게 줄거리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패터슨은 같은 날들 속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에서 매일의 시어를 찾아낸다. 같은 성냥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보이므로, 성냥들은 하나의 시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포개어진 고백이 된다.
‘Here is the most beautiful match in the wold
...
so sober and furious and stubbornly
ready to brust into flame
lighting perhaps the cigarette of the woman you love’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주 패터슨시를 여행하는 가장 시적인 여행법이다. 왜냐하면 가장 시적인 가이드가 안내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틈새를 찾아 운율이 있는 해설을 쓴다. 예를 들면 매일 다르게 보이는 우편함의 기울기 같은. 그래서 패터슨의 시선을 빌리면 패터슨 시는, 세상은 온통 시다.
패터슨은 퇴근길에 공장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를 만난다. 시를 쓰는 소녀는 패터슨에게 water와 fall 사이를 띄워 썼다는, ‘각운이 별로’라는 시 ***Waterfalls를 보여준다. 집으로 돌아온 패터슨은 주방 한쪽에 걸려 있는, 자신이 점심을 먹으며 시를 쓰곤 하던 폭포의 사진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린다. 저녁을 먹고 단골 바로 향하던 길에는 코인세탁소 앞에서 오래 멈춘다. 세탁소 안에는 래퍼가 혼자 열심히 연습 중이다. 패터슨은 각운이 멋지게 들어맞는 랩을 듣고 나서 그와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연습하세요.”
“느낌 올 때마다 어디서든 하죠.”
단골 바에서는 연인과 헤어진 애버렛이 한바탕 소란을 피운다. 다시 한 번 이별을 통보받은 그는 바를 떠나며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의 버스에는 늘 쌍둥이가 탄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쌍둥이. 같은 사람들의 다른 말들. 삶은 생의 구석구석에 위트를 숨겨두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처럼. 그래서 패터슨과 패터슨시를 투어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일상이 이토록 시적이었던가?
영화 <패터슨>을 보고 난 후에는 종종 패터슨처럼 여행한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고, 이전과는 다른 길을 걷고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살핀다. 이틀 일정의 출장이었다. 숙소는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난 걸어서 닿을 만한 거리였다. 뒤편의 뒤편으로 이어진 골목이 많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패터슨’이 찾아왔다. 나는 전날 산 빵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산책을 나섰다. 휴대폰이 없는 패터슨처럼, 휴대폰은 숙소에 놓아둔 채로.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샀다. 주먹 쥔 손이 따뜻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눈에 보이는 풍경을 따라 길을 잡았다. 상점 앞 외딴 플라터너스 두 그루가 생뚱맞게 서 있었는데 그 쌍둥이 나무는 돌아오는 길의 지표 삼기에 좋았다. 어느 집 대문 앞에는 손수레와 장화와 절구와 지팡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나올 때는 스쳐 지난 분재들이 보였다. 그것은 한없이 우아해서 잠시 골목 모퉁이를 잊게 했다. 길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을 가진 블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벽과 블록 사이로 초록색 잡풀이 자랐다. 보이지 않는 틈새를 비집고 올라 웃자란 그것은 생각보다 단단한 생명이었다.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제법 오랫동안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단단한 풀들, 아침 산책에서 만난, 어제는 몰랐던’
나는 혼잣말로 읊조린다. 그것들은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다른 울림을 갖는다. 아침 산책에서 만난 잡풀들은 그 사이 좀 더 단단해진 듯 보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제 풀들이 보인다. 골목의 틈새에 자란 풀들은 곳곳에 있었다. 흙이 보이는 틈새에 어김없이 뿌리를 내려 자란다. 심지어는 갈라진 벽 틈에도, 어느 집 대문의 지붕 위에도. 흙이 있을까 싶은 아스팔트 위로 풀들이 자란다.
‘틈틈이 풀들이 자란다. 콘크리트보다 단단하게’
이런 기억도 있다. 내가 패터슨을 알기 훨씬 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날 역시 꽤나 시적인 여행이었다. 겨울 제주였다. 나는 한라산 1100고지를 넘는 버스 안에서 함박눈을 맞았다. 마음을 졸이다 이내 설경에 압도당했다. 다행히 오른쪽 제일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버스 안의 풍경이 사라지고, 함박눈이 눈앞에 난분분 꽃잎처럼 날렸다.
‘하~’
버스기사님이 감탄하는 내 쪽을 힐긋거렸다. 세상은 멈춰서고, 멈춰선 세상에서 버스만이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가는 장면은 가히 감동이었다. 풍경은 시간과 따로 떨어져 흐르는 듯했고, 세상의 모든 눈은 나를 향해 내달렸다.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뜬금없는 음악이 버스 라디오에서 흘렀다. 버스운전기사님이 피식 하고 웃은 것 같았다. 나도 피식 하고 웃었으니까. 그 노래의 등장은 비현실적일 만큼 영화적이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하~’
나는 또 깊은 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날 ‘내 나이가 어때서’는 바깥의 풍경만큼 아름답고 서러운 노래였다. ‘눈물이 나’는 건 ‘정말 내 사랑’을 찾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벽이 된 ‘내 나이’ 때문일까. 나는 내 나이를 헤아려보며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를 생각했다. 서귀포시에 가까워졌을 때는 눈이 그치고 말간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버스에 타는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며 ‘사랑하기 좋은 날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기사님에게도.
<패터슨>은 후반부에 이르러 ‘큰 사건’이 일어난다. 패터슨이 아내와 주말 공포 영화를 보고 온 사이, 잉글리시블독 마빈이 패터슨이 시를 써둔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물어뜯어 찢어 놓았다. 영화보다 공포스런 현실. 패터슨은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에게 시인 존 키츠의 묘비명을 빌려 담담히 말한다.
‘그건 단지 물위에 쓴 낱말들일 뿐이다’
그는 매일 점심을 먹던 폭포 앞에 앉아 마음을 추스른다. 그가 폭포를 바라보며 썼던 시들은 진정 물 위에 쓴 낱말들 뿐이었을까? 그때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사랑해, 그가 태어나 자라고 시를 쓴 패터슨시를 직접 보고 싶어 찾은 일본인 여행자가 곁에 와 앉는다.
“혹시 그쪽도 패터슨 시의 시인이십니까?”
패터슨은 잠시 망설이다 답한다.
“전 버스 운전사에요. 평범한 운전사죠.”
말의 공백은 이제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비밀노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답을 들은 일본인 여행자가 말한다.
“패터슨시의 버스운전사군요. 참 시적입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같습니다.”
+ 페이드아웃, 여행이 끝났을 때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시집 <패터슨>의 도시를 누비는 버스운전기사다. 패터슨의 삶은 이미 시적이다. 패터슨의 버스는 시의 행이 되고, 그가 시를 쓰려 멈춰선 시간은 연과 연 사이의 쉼이 된다. 그의 발자국이 문장이고 시다. 그건 그가 시를 쓰느냐 아니냐와는 무관하다.
모두가 시인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거닐 때 우리는 누구나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여행은 몸으로 느끼고 발끝으로 써나가는 시이므로. 그리고 시상은 함박눈 내리는 날 한라산을 넘을 때만 떠오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겨울 여행의 날들을 늘 함박눈이 맞아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가 여행할 때 그곳은 이미 누군가의 시 속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속에 살고, 패터슨이 만난 사람들 역시 패터슨의 시 안에서 다시 산다. 그러니 우리의 궁색한 여행도 누군가에게는 제법 시적일 수 있다. 우리의 초라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일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패터슨의 무덤덤한 하루를 떠올리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것은 시큼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그러나 그것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기도 해서, 혼자 맛보고 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 날은 버스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그럼 눈앞의 풍경이 어떻게 안겨오는지,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의 표정이 두서없이 스치는지, 얼마나 다채로운 사연이 버스의 계단을 오르내리는지가 보인다. 그런 날은 운전석 어디쯤에 붙어 있을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마저 시처럼 다가온다. 그런 날은 ‘나’라는 말이 시(詩) 속을 여행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자두(This is just to say)'처럼.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냉장고/안에 있던/자두/내가 먹었어요/
그건/아마도 당신이/아침상에 내려고/보관했던 것/
용서해요/그것 참 맛있었어요/너무 달고/너무 찼어요’
*영화에 나오는 패터슨의 신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시인 론 팻지(Ron Padgett)가 썼다.
**<모든 날은 인생이다>는 강신재 작가의 책 제목이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시처럼 써나가는 그의 여행기 또한 추천한다.
*** 소녀의 시는 짐 자무시 감독이 직접 썼다.
**** <뉴시스>(2013년 4월 29일)에 '고봉진 칼럼'의 해석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