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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석 Sep 17. 2019

옳고 그름에 대하여

영화 러덜리스 후기

영화 러덜리스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이 죽었다.


자녀를 잃은 가족들은 오열한다.

친구를 잃은 친구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한 부모 역시 아들을 잃었다.


부모는 슬퍼할 수 없다. 위로받을 수 없다.

하나뿐인 자녀를 잃었으나 결코

온전히 그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러덜리스(Rudderless, 2015)
 1. 방향키가 없는,
 2. 어쩔 줄을 모르는,


위에서 말한 청년들은

사람에게 총격 난사로 죽을 당했다.


바로 그 슬퍼할 수 없는 한 부모의 아들에게.


영화 '러덜리스'는 총격 난사범의 부모,

그중에서도 아버지 '샘'의 감정과 일상초점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혼한 부부 관계를 가졌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샘은,

아들의 범죄로 삶에서 절대 겪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을 겪는다.


실성, 분노, 좌절, 체념, 회피.


이 영화는 샘의 아들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변호하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 전달과 아들이 남긴 노래만을

샘을 통해 리에게 들려줄 뿐.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주목되고 선과 악, 흑과 백의 논리만이 중심이 되는 회가 익숙한 우리에게 색 지대(가령, 가해자의 부모)에 연스럽게 시선이 가도록 만든다.


극 중 샘의 아들 개인의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범행 동기나 행동의 원인을 우리는 샘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어렴풋이 조각조각 맞춰갈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아들의 노래를 통해 아들을 마주했다는 것.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들이라,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고 아들을 무시해왔던 샘은, 아들이 만든 노래를 통해 비로소 아들과 마주다. 그리고 한 자녀의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느낄 수 있는 측은함과 '보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두렵기만 했던 아들의 범죄의 결과로 희생된 자녀들 역시 마주한다.


어떻게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가치 판단의 기준을 이 영화에 세울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당혹스러운 감정과 복잡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해보지 못한 사실관계와 감정들을 받아들이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색안경 없이 샘을 바라보지 않는 것조차도 역시나 마음 편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더군다나 도무지 공감될 수 없는 상황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담담히 마주하게 한다.


내가 이 영화를 전체 다 이해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나마 복잡한 마음에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다른 청년의 삶을 파괴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낳은 아들의 노래로 다른 청년의 삶을 꽃피울 계기를 마련주었다는 것. 이러니지만 사실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었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더군다나 무겁고 차가운 이야기를 부드럽고 차분한 노래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다가설수록 가지 질문을 되뇌게 된다.


옳고, 그른 것은 무엇인가?




출처 : 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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