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망진창>
최근 트랜스젠더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와 여대 입학이 있다. 내가 그들의 의지와 용기에 미약한 위로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몇몇 입장들을 보면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혐오와 비난으로 얼룩진 댓글 창은 말 그대로 ‘댓. 망. 진. 창’
<양의 탈의 쓴 늑대>
예로부터 혐오와 차별에는 온갖 꼬리표가 붙는다. “내가 불편해서”, “보편적이지 않아서”, “거부감이 느껴져서” 등등. 그냥 깔끔하게 “그래, 나 혐오주의자다!”하면 최소한 위선적이지는 않을 텐데 기를 쓰고 자신이 혐오주의자는 아니라는 사람들. 정확히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혐오라는 사실 조차 인지할 능력이 없고,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거다. 무지가 죄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 중 하나.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늑대인 당신은 양의 탈을 썼지만, 보세요. 가면 사이로 당신의 무자비한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네요. 나는 속지 않아요.”
<당신도 불편한 사람이다>
화두가 되고 있는 사건들의 경우 “그들을 받아들일 사람들의 불편함을 존중해 달라!”가 핵심이다. 이외 다른 의견들도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위와 같은 의견들이다. 인정한다.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존재를 직면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하지만 그들의 말속에는 ‘자신’을 위한 존중만이 있을 뿐 ‘타인’을 위한 존중 따위는 없다. 이렇게 따지자면 모든 사람은 어디에 선가는 배제당해야 마땅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과 웃는 얼굴로 지낼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싸우는 사람도, 관계가 끊기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이 되었든 간에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 존재이다.
자, 이제 누군가 당신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 칼은 쥐어졌고, 당신의 존재는 그의 칼날 앞에 순순히 스러져야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의 불편함을 존중해줘야 하니까.
<자신의 불편함이 권리라는 착각>
사람들은 ‘불편함’을 무슨 헌법에 적힌 기본권 마냥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편함은 신성불가침 한 권리의 영역이기에 이것을 침해하려는 모든 것을 배재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시길 당신의 불편함은 어떠한 권리도 될 수 없다. 불편함은 타인의 배려에 의해서 ‘이해’될 것이지, 당신이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과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정말 많다. 나는 덤덤한 성격인 반면 가족 중에는 예민한 성격인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가끔은 부당하고, 짜증 날 때가 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예민한 가족에게 “왜 너의 예민함으로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거야! 너도 너지만, 나의 불편함을 존중해서 나가 줄래?”라고 한다면 다른 가족들이 얼씨구나 하고 나에게 따봉을 주겠는가? 그보다는 “이게 미쳤나”하고 나를 내쫓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내 불편함만 알고 남을 배려하는 법은 몰랐거든.
‘배려’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이다. 불편함을 사랑으로 치환하기 위한 가장 세련된 공식 중 하나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홈 하나 없이, 결점 하나 없이, 불편함 하나 없이 친절한 존재일 수만은 없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러니 당신의 불편함은 권리가 아닌 타인의 따듯한 배려에 기댄 ‘이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당신이 쥐어야 할 것은 배제의 칼날이 아니라 이해를 요청하는 따듯한 손편지다.
<불편함의 권력>
유독 사람들은 동성애자, 트랜스 젠더 등의 성소수자에게 불편함을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마치 성소수자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마주치는 불편인 것처럼 여긴다. 사실은 집에서 듣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꼴 보기 싫은 친구가, 부조리한 직장 문화가 훨씬 자주 마주치는 불편함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한다.
성소수자에게 혐오를 내뿜는 사람들의 불편함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자신 외에도 수많은 공범자가 있어서 자신의 혐오를 보편의 이름으로 우겨볼 수 있을 것. 둘째 자신의 혐오에 대해 돌아올 리스크가 없어야 할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불편함은 권력으로 형성된다. 혐오자들은 불편함이라는 깃발 아래 결집하여 이를 마치 권력처럼 휘두르며 자신들이 지정한 대상을 삶의 무대에서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현실에서 성공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혐오보다 강하다>
공포영화에는 종종 살아있는 존재가 죽은 존재보다 강하다는 대사와 함께 악령의 퇴마에 성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혐오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있는 존재들의 용기와 의지 앞에 패배할 것이라 믿는다.
이번의 두 사건에서 사건의 당사자분들이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와 이를 위한 눈물이 있어야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자신이 입을 열었을 때 다가올 수많은 혐오들에 몇 날을 울고, 떨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다가올 두려움 앞에 무릎 꿇지 않았고, 의지와 용기로 혐오를 뚫고 나가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살아있는 존재는 죽은 존재 보다 강하다. 그들의 존재 뒤로 이어질 작은 용기들이 혐오보다 더 강하고, 굳건하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들과 맞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공간을 빌어서나마 이번 사건들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그들에게 존재와 용기에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혐오자들은 시시껄렁한 혐오의 이유 따위를 들먹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안심해라. 이어지는 용기와 의지의 역사 앞에 언젠가 바스러질 시시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