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ruman, Before Parasite

- 벗어날 것 이냐 포기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INTRO

삶은 끝임 없는 물음의 연속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음이다. 행복, 정의, 인간, 시대에 대한 물음들은 늘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온다. 「트루먼 쇼」(1998년 개봉, 피터위워 감독)는 우리의 시대에 대한 물음이며, 「기생충」(2019년 개봉, 봉준호 감독)은 과거의 물음에 대한 현재의 답변이다. 두 작품은 만들어진 시대도 사회도 다른 영화지만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멸되는 인간성을 주인공들의 행동과 소품 같은 정교한 상징들로 다루고 있다. 「트루먼 쇼」는 소비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성이 어떻게 상품화되고, 소비되는 가를 다루고 있으며, 「기생충」은 상류층의 자본으로써 종속되는 하류층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빨간약과 파란약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트루먼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의 인생은 방송국, 시청자, 기업의 소비 카르텔을 위해 기획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시청자는 심심풀이, 기업은 광고효과, 방송국은 광고료를 위해 곳곳에 숨겨진 카메라에서 tv로 송출되는 그의 삶을 소비한다. 그의 삶이 인간성에 대한 모든 담론을 거세당한 채 철저히 소비만을 위한 상품으로 유통되는 과정은 언뜻 사이코패스적으로 보이지만 현실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유별난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맥을 탁 풀리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이 인격의 훌륭함이 아닌 노동력으로써의 효용가치를 증명하기를 주문한다. 여기에 실패한 개인에게는 사회적 실패자와 낙오자의 낙인을 찍히는데, 착한 사람이 바보가 되고 인격적인 인간보다는 돈 많은 인간이 ‘참인간’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트루먼 쇼」와 「기생충」은 이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안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자신이 상품화되는 것을 거부하여 체재에 반항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현실을 수긍하고 현실을 재생산하는 주체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트루먼 쇼」는 전자, 「기생충」은 후자에 속한다. 「기생충」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를 구태여 묻지 않는다. 대신 상류층의 노동 자본으로써의 종속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들도 언젠가는 상류층으로 편입되기를 바라지만 그 소망은 자신이 나비의 유충이라는 착각에 빠져 오지 않을 우화의 순간을 기다리는 기생충의 일장춘몽일 뿐, 나비의 선을 넘지 말라는 일침에 바로 깨져버릴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꿈을 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혹한 현실을 눈치 챈다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AT. 22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격성에 대한 「트루먼 쇼」, 「기생충」의 비판과 폭로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마저 자본에 의해서만이 유통된다는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다. 두 영화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것도 상업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고, 그 비판마저 자본으로 치환되는 것이 현실이다.

「트루먼 쇼」는 우리에게 탈출의 성공 여부를 묻는다. 여기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깜빡이는 「기생충」의 불빛. 98년으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탈출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인간의 자본에 대한 종속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생존 신호만을 모스부호로 간신히 찍어내는 기생충이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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