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번째 편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
이번 달 말 내가 어렸을 적부터 다니던 동네의 목욕탕이 없어진다고 한다. 비닐하우스들이 있던 자리에 빽빽한 아파트가 심기고, 빈 소라껍데기에 게가 들어가 살 듯 떠나간 구멍가게의 빈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서면 동네가 개발될 때도 목욕탕만은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그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다른 애들은 다 하던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놀 것이 마땅치 않던 나에게 그곳은 놀이터였다. 냉탕에 들어간 나는 한 마리의 돌고래가 되었고, 뜨거운 김이 숨 쉬는 사우나에서는 친구들과 누가 오래 버티는가 시합을 하고는 했다. 그 후 정든 친구들이 떠나가고 성인이 된 후로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의 피난처가 돼주었다. 뜨거운 탕에 앉아 솟아나는 증기를 보고 있자면 시간은 그것의 뭉근하고 느릿한 움직임과 엉겨 붙어 블루스를 추었고,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스웨터에 튀어나온 실올을 잡아당기듯, 헝클어진 생각의 실타래를 다듬고는 했다.
그랬던 목욕탕이 이제는 사리진 다고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추억 속에서만 아른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일지 폐업을 이틀 앞둔 목욕탕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찢어지듯 가슴을 아파할까, 계속해서 그리워하게 될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냐는 듯 담담하게 내일을 맡이 할까. 아마 당분간은 이곳이 많이 그리울 거야, 그래도 마음을 태우지는 않겠지. 그리고 한 달, 아니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그리움을 추억의 진열장으로 옮겨 놓고 다시 태연한 나날들을 맡이 할 거야. 그러던 중 덜컥 ‘그럼 내가 사라지고 난 후에 세상은?’하고 드는 생각이 들었다.
동이야, 곧 사라질 목욕탕처럼 우리에게도 언젠가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올까. 만약 그때가 와서 네가 나를 떠나간다면 나는 많이 울 것 같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젖어버릴 정도로 몇 날 며칠을 아주 많이. 그리고 네가 떠나 간 자리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그곳에 머물렀던 너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감게 되겠지. 시간이 지나 차올랐던 슬픔이 거짓말 같이 빠져나가고 빈자리를 돌아온 일상이 채우고 나서도 문득 네 생각이 떠오르는 날이면 나는 그만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동이야, 설령 내가 너와의 만남으로 인해 언젠가 까무러칠 만한 슬픔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주저앉아 버리게 되더라도 나는 너와의 만남에 감사할게.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는 사실을 언제 올지 모를 너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알게 되었다. 소중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여백이 무(無)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네가 떠나가고 남은 자리의 여백이 내게는 너무나도 마음 아프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너를 영원히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테니까. 이별은 소멸이 아닌 영원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네가 떠나간 자리에 죽음을 알릴 묘비 따위는 세우지 않겠다. 대신 너와 나의 만남이 있었음을, 그리고 서로가 영원한 관계로 남았음을 기념할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