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기름진 고기가 생각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지인에게 연락을 해 고기를 먹으러 간다.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내 혀의 소망과는 다르게 지갑은 수년간 무소유의 담백함을 실천하고 있는 중 이므로 고기를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는, 그러나 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적당한 집을 물색해 들어간다.
예수가 인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린 것처럼 고기는 불판 위에서 나의 혀에 봉사하기 위한 기름을 주욱 흘린다.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입에 넣는다. 농후한 기름의 맛이 나를 황홀경으로 인도한다. 맛있는 음식에 술이 빠질 수 없으므로 술도 한 병. 소주는 역하니까 달달한 청하로다가.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젓가락질에 가속이 붙는다. 이때부터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건지 쩝쩝 거리는 소리를 asmr처럼 들려주고 싶은 건지, 고기를 먹기 위해 온 것인지 술을 먹으로 온 것인지 인지의 경계가 흐리멍텅해지기 시작한다.
나를 춤추게 했던 첫 점의 숭고함은 뇌를 얼얼하게 하는 성수에 씻겨나간 지 오래다. 아니, 숭고함이라는 게 있기는 했던가? 접시에 담긴 고기에 의문을 제기해 보지만 내 혀에 실컷 농락당하기 위해 죽은 소는 말이 없다.
숭고함이란 무엇인가? 저 바다건너 각국의 보물을 모아놨다는 찬탈의 창고에나 도도하게 걸려있는 것인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숨을 거둔 영웅과 함께 그의 묘지에 묻혀있는 것 인가. 대리석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다 보니 몇 번인가 느꼈던 숭고함의 데자뷰가 일어난다. 처음은 교회 유치부에서 보았던 수유장면이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젓을 물리는 행위에서는 어떤 수단에 대한 지향도 목격할 수 없다. 젓을 먹이는 어머니는 아이가 모유를 먹고 천재가 되어서 방송에 나가 짭짤한 소득을 자신에게 안겨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모유수유를 해준 것에 대해 아이가 넙죽 절을 하며 자신에게 감사를 표시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순간 어머니의 모든 것은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 충만해진다. 모든 사사로운 이유들이 소거되고 그 젖을 먹는 아이만이 남는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는 부끄러운 살갗을 드러냄에도 포르노가 아니고 에로틱마저도 초월한다. 숭고함이란 모든 수단성을 초월해 대상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점점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 서로가 서로의 지옥이 되는 것 모두가 숭고함의 결핍에서 오는 병리적 증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확장시키기 위해 타자를 수단으로써 활용한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타인을 생산의 도구로써 착취하고, 불로(不老)하기 위해 애썼던 진시황처럼 불로소득(不勞所得)을 얻기 위해 세입자를 착복하고. 그렇게 타인을 수단으로써 탐식하다보면 사고의 혈관에 아집의 기름이 끼고 부덕(不德)으로 비대해진 지방층은 정상적인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주변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생태교란종으로 성장한 황소개구리는 언젠가 사냥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고혈압으로 쓰러지겠지.
인간이 살기 위해선 숭고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omr답안지 위에 선택지 같은 것도 아니고 성인(聖人)들이 행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것도 아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존중하는 것. 숭고함이란 결국 보편의 또 다른 이름이고 인간다움의 동의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친 영혼을 달래줄 야밤의 치킨도 아니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캠핑도 아니다. 사고의 혈관에 찌든 때를 씻어내고 머리를 맑게 해줄 그런 것이 우리는 필요하다.